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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신입생으로 처음 만난 그, 이어령…신간 '만남'

입력 2024-05-0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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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신입생으로 처음 만난 그, 이어령…신간 '만남'
[연합뉴스 자료사진]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절절한 그리움 담은 에세이 '만남'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까까머리를 막 기르고 있는 대학 신입생의 모습으로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이름을 안 것은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던 것 같다. 머리가 짧아 얼굴이 네모로 보였다. 무언가가 안에 꽉꽉 차서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모습…. 호기심에 빛나는 눈이 눈부셨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에 있던 서울대의 임시 교정에서 수줍음 많던 학생 강인숙(현 영인문학관 관장)은 운명의 동갑내기 짝을 만난다. 그의 평생 반려자로서 후에 한국 문학과 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뜬 지식인 이어령(1933~2022) 초대 문화부 장관이다.

서울대가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옮겨오고 나서 이어령과 강인숙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다가간다.

대학생 강인숙이 삼각지에서 종로 5가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거기서 동숭동의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까지 두 정거장을 걸어 다니던 때 둘은 부쩍 가까워진다.

"언제부터인가 그 길을 내가 혼자 걷고 있으면 이어령 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4년 새 학기의 일이다. 서너 달이 지나자 다방에 같이 앉아 있을 만큼 진도가 나갔다. 종로 5가의 기독교 방송국 안에 있던 다방 이름은 호산나였다."
강인숙 관장은 이 당시의 이어령에 대해 "늘 새로웠고 항상 발랄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쳐서 그와 만나는 시간은 즐겁고 행복했다. 그의 화두는 언제나 새로워서 정신연령이 쑥쑥 자라는 느낌이 들어 사는 일에 신명이 났다"고 회고한다.

강 관장이 최근 고인을 그리며 펴낸 에세이 '만남'(열림원)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책에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가정은 물론 학문과 예술의 길도 함께 걸어온 도반(道伴)이었던 두 사람의 만남의 순간들이 생생히 담겼다.

둘의 만남은 서울대 국문과 입학 동기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또 가볍게 사귀는, 요즘 말로는 '썸타는' 남녀 관계로 나아간다. 그렇게 쿨하게 석 달가량을 만나던 어느 날 이어령은 강인숙 앞에 불쑥 나타나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면서 "큰일났네" 하고는 가버린다.
"그때부터 내 세계에는 새로운 태양이 떴고, 나는 그를 향해서 도는 해바라기가 되었다. 평생을 같은 태양을 향해 도는 해바라기가 된 것이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70년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두 사람이 동갑내기 부부이자 친구이자 연인으로 일평생을 함께 해온 이야기이자, 저자의 고인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의 기록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사랑을 키워가던 연애 시절에서부터 아흔 무렵의 이어령이 투병 끝에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게 된 모습이 안쓰러워 마주잡고 큰 소리로 통곡했던 이별의 시기까지, 함께 울고 웃었던 70년의 세월이 차분하고 정갈하면서도 때로는 격정적인 필치로 담겼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 이전의 이야기들도 있다.

생전에 남편에게서 들은 증언과 가족들의 전언을 토대로 한 고인의 뿌리에 얽힌 이야기, '행복한 막내 도령'으로 자랐던 유년 시절, 11세 무렵 책을 그리도 좋아하던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몰아닥친 불행, 고독과 설움 속에서 견딘 사춘기 등 이어령의 세계를 이룬 삶의 토대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부록으로 이어령 선생의 넷째 형과 외사촌 누나가 쓴 글도 함께 수록돼 부인인 강인숙 관장이 잘 알지 못하는 고인의 새로운 면모도 살펴볼 수 있다. 고인이 부인인에 대해 쓴 유일무이한 글 '정복되지 않는 네모꼴의 신비'도 함께 실려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이자 지식인, 문화행정가이기 이전에 한 남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기록이라 더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부부가 함께 거쳐간 여덟 곳의 집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글로 지은 집'(2023)에 이은 두 번째 회고록이다. 저자 역시 국문학자로서,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남편인 이어령의 정신세계의 기원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대목들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문학평론가, 교수, 문화행정가, 에세이스트, 예술가 등 어느 하나의 직업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폭넓게 활동해온 지식인 이어령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무엇일까.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저자는 '예술가'라고 했다.

"이어령 선생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였지 행정가나 정치가나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창조하는 부분만 빼면 그냥 보통 사람이죠. 결점과 장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그런 인간 말입니다. 다만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여, 창조의 붓을 놓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속에 이어령이라는 한 인간의 온 무게가 다 실려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열림원. 284쪽.


yonglae@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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