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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에 몸이 두 개이고 싶다는 생각도…" 멈추지 않는 '월드스타'의 배구 시계 [스포츠조선 지령 1만호 인터뷰]

이종서 기자

입력 2024-01-22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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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에 몸이 두 개이고 싶다는 생각도…" 멈추지 않는 '월드스타'…
14일 장충체육관에서 前배구감독 김세진 해설위원이 본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충=송정헌 기자songs@sportschosun.com/2024.01.14/

[스포츠조선 이종서 기자] 선수에는 '왕조'를 열었고, 감독으로서는 '우승'을 맛봤다. 그야말로 배구로 누릴 수 있는 최고는 모두 맛봤다.



김세진(50)에게는 '월드스타'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그야말로 배구계가 낳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다.

스포츠조선의 창간호가 나온 1990년. 그는 "배구 선수 김세진이 탄생한 시기"라고 했다. 34년이 지나 어느덧 1만호가 나온 2024년. 김세진은 "몸이 두 개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스포츠조선 창간이 1990년이었는데, 당시 김세진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1990년에는 나에게도 의미가 컸던 해였다. '배구 선수' 김세진이 시작된 1년이지 않을까 싶다. 당시에는 옥천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 몸이 허약 체질이라고 해서 어머니께서 CA 활동으로 운동을 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직업이 됐다. 나는 높이뛰기를 하다가 배구를 하게 됐는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년 반 사이 갑자기 확 커버렸다. 그동안 키가 작아서 세터를 했는데, 키가 크면서 공격수도 할 수 있게 됐다. 원래 양손잡이었는데 어릴 때에는 세터를 해서 왼손을 쓰는 지 모르고 있다가 대학교에서 왼손잡이 공격수로 포지션이 바뀌었다. 아마 스포츠조선의 탄생과 함께 '배구 선수' 김세진도 함께 탄생한 1년이 아니었나 싶다.

- 대학시절부터 '월드스타'로 이름을 날리고 삼성화재 창단 멤버가 됐다.

▶1994년 월드리그 때 아시아 선수 최초로 공격수로 공격상을 받았다. 당시 수비나 세터에서는 아시아권 선수가 받은 게 있었는데 공격수는 처음이라 그래서 '스타가 탄생했다'고 하면서 닉네임을 만들어주셨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그 당시에는 선수가 구단을 생각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삼성화재로 가면서 신치용 감독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 청소년대표팀 코치도 하셨고, 국가대표 코치로 계셨었다. 같이 생활을 해서 좋았다.

- 그 시대에 해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김세진이 가지고 있던 강점은 무엇이었나.

▶왼손잡이 공격수 였기도 하고, 신장이 큰 편이었는데 스피드가 좋은 편이었다. 발도 빠르고, 스윙도 빠른 편이었다. 높이와 스피드가 있었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 삼성화재의 왕조 시대를 함께 했다. 그 중 선수 김세진은 어떤 사람이었던 거 같나.

▶당시 삼성화재는 정말 좋은 팀이었다. 나로서는 포장하려는 게 아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좋은 분을 많이 만났다. 신치용 감독님도 그렇고, 신진식, 김상우 등 잘하는 또래 친구들이 있어서 선의 경쟁도 많이 했다. 한 팀에서 국가대표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동료가 많았다. 그 덕분에 이름값을 하면서 살았던 거 같다.

-은퇴식도 성대하게 열렸다. 기억이 나는지.

▶아직도 생생히 생각난다. 당시에는 몸도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였고, 선수로서 마음이 많이 떠났다. 키가 컸으니 미들블로커 자리가 부족해 조금 더 뛰었으면 좋겠다고 구단에서 만류도 했는데 내가 그만하겠다고 했다. 외국인 선수도 들어올 때였는데, 밀려서 나가기 싫었다. 내 발로 나가겠다고 하는데 감사하게도 은퇴식을 화려하게 해주셨다. 당시 스포츠조선에서 김상우 감독과 뽀뽀하는 사진도 찍어주고 그랬다.(웃음)



-은퇴 이후에는 곧바로 해설로 뛰어들었다.

▶사실 정신이 없었다. '이게 내 일이다'라는 걸 떠나서 은퇴를 해도 할 일이 많구나라는 걸 느끼면서 바빴다.



-그러다가 러시앤캐시 배구단 창단과 함께 감독으로 시작하게 됐다.

▶ 멋 모르고 덤볐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윤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코치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프로구단의 수장을 맡긴다는 게 모험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해주셨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연맹에 들어와 있고, 어떤 다른 배구 인생을 꿈꿀 수 있는 큰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다.



- 감독을 하면서 특별한 제자가 있었나.

▶ 아무래도 (송)명근이, (이)민규, (송)희채, (정)성현이 등 구단 1기 선수들이 생각난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좋은 일도 많았다. 지나가면 알 수 있다는 게 있지 않나. 참 소중한 인연이었다.



- 두 시즌 연속 챔피언결정전 우승도 하는 등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를 쌓고 있었는데, 2년 연속 최하위 성적에 사의를 표했는데.

▶사표를 낸 뒤 스포츠조선에 단독으로 보도 됐더라. 그 때도 구단에서 고민이 많았을 시기였다. 창단팀이고 외국인 선수를 뽑는 제도도 바뀌었다. FA도 걸리고, 선수들도 군대를 가면서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만약 그 상황이 생긴다면 안 나가고 세팅을 해보겠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생각에는 변화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후회는 없었는지.

▶ 다들 자진 사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진 사퇴를 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대부분이 경질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진짜 자진 사퇴를 한 거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남은 연봉 안 받겠다고 하고 내보내달라고 했다. 당시 구단에서도 감사하게도 더 해보자고 하셨는데 지금도 같은 선택을 할 거 같다.



-감독 김세진은 어땠던 거 같나.

▶재미있는 사람? 선수들과 함께 하고 재미있게 다가가면서 감독 생활을 한 거 같다.

-선수와 감독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 선수 인생에 있어서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모든 게 준비가 잘됐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을 상대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셧아웃 패배를 당했다. 자신감이 있었던 만큼, 충격도 컸다.

감독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첫 우승 때였다. 당시 포지션을 파괴하고 재배치하면서 시즌을 구상했는데, 뜻한대로 됐다. 그만큼 감격적이었고 기분 좋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해설위원으로 왔다. 이전보다는 시야가 넓어졌을 거 같다.

▶ 확실히 편해졌다. 선수들 심리에 대한 것도 충분히 이야기해줄 수 있었고, 기록적인 접근보다 현장 돌아가는 분위기나 점수 한 점, 한 점이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기 수월해진 거 같다.

- 이번 시즌부터는 연맹의 일원으로 새로운 배구 인생을 열었다.

▶ 처음에 들어올 때는 행정일도 좀 배우고 싶어서 왔다. 배구 분야 곳곳을 다 알면 내 배구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게 됐다. 와서 보니 분야도 다르고 해야할 일도 상당히 많더라. 50세 넘어서 몸이 두 개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배구장은 내게 늘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공간이었다. 선수와 지도자를 할 때는 승부의 세계였고, 해설 역시 그 상황을 봐야만 했다. 지금은 한 발 물러나 행정적 처리를 하고 있으니 다른 느낌이 있다.



- 배구를 한 발 떨어져서 보면서 과거보다 배구 인기도 떨어지고 '스타 플레이어'도 많이 사라진 부분이 아쉬울 거 같기도 하다.

▶연맹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다. 흐름이란 걸 알아야 할 거 같았다. 우리 배구가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단순한 돈 되는 사업이 아닌 퀄리티 있는 인적 자원을 많이 늘리고 싶은게 숙제이자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스타플레이어 역시 구단과 연맹이 많이 협력하고 노력해야할 부분인 거 같다. 같이 밀고 끌고 해줄 수 있는 조화가 필요한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유소년 정책부터 스카우트 부분까지 많은 고민을 해봐야 할 거 같다. 스포츠는 스타 마케팅이 기본이 돼야 한다. 스타플레이어가 있는 종목이 인기 종목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니 그런 부분에서 노력해 봐야할 거 같다.

그래도 긍정적인 건 작년보다 지표가 올라왔다. 누가 이긴다고 보장을 못하는데다가 경기 내용이 재밌다보니 관중들도 배구장을 찾아주시는 거 같다.



- 앞으로 1만5000호, 2만호에 다뤄질 '김세진'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나.

▶ 사실 2만호까지는 아직 생각을 못하겠다.(웃음) 1만 5000호에는 초등학교 아이들과 뒹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항상 어릴 때부터 강조했던 게 유소년이 강화되고, 배구를 하려는 아이가 많아야 스타가 탄생하고 선수가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그 뼈대와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을 쏟고 싶다.

이종서 기자 bellstop@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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