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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의 컬쳐스퀘어] '귀하신 몸' 중견배우 모시기 경쟁, '노병의 귀환' 왜?

정현석 기자

입력 2015-03-02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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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하신 몸' 중견배우 모시기 경쟁, '노병의 귀환' 왜?


일상의 관찰력을 동원해보자. 지하철을 타보면 한사코 노약자석 주위로 가지 않는 어르신이 있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좌석 앞에도 잘 안선다. 그저 출입문 쪽 외진 곳을 선호한다. 주위 누군가가 자칫 "앉으세요"라고 할까봐서다. '배려' 받기 보다는 여전히 '배려'할 나이라고 굳게 믿는 분들. 이분들 대체로 건강하다. 믿음만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요즘 시기의 나이듦이란 참 다채롭다. 물리적으로 획일화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나이가 많아서 늙은게 아니고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늙어진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을수록 세월이란 파도에 의한 마모가 줄어든다. 관심만큼 외모도 천차만별이다. 첫 눈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경우가 참 많다. '아저씨=후줄근'이란 자동 연상의 시대는 지났다. 얼굴과 매무새에 시간과 돈을 기꺼이 투자하는 '꽃중년'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꽃중년과 노병들의 전성시대. 우리 사회의 거울, 대중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다. 놀아도 젊어서 놀아야 제 맛이라지만 나이든 이분들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참 맛깔나게 논다. 중견 배우들 이야기다. 상황을 살펴보자. 거침 없이 상승하던 MBC 주말 드라마 '전설의 마녀'.최근 시청률이 살짝 답보 상태다. 하지만 큰 이탈은 없다. 시청률 지킴이 일등공신은 김수미다. 시청자들은 "요즘 내용이 조금 식상해졌지만 김수미 보는 맛에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실제 이 드라마는 중간 투입된 김수미의 인기를 적극 활용한 케이스다. 김수미 표 코믹연기에 시청자들이 반응을 보이자 분량을 대폭 늘렸다. 김수미의 존재감은 젊은 주인공 뺨 칠 정도다. 여세를 몰아 오는 5일 개봉하는 영화 '헬머니'를 통해 스크린 장악에 나선다. 연기파 중견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빈도가 늘고 있다.

최근 종영한 주말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는 시청률 40%를 넘는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중심에는 중견배우 유동근이 있었다. 이 배우에게는 극의 중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극중 유동근은 참 따뜻한 아버지로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명불허전 연기로 드라마의 대표 얼굴이 됐다. 화제의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마찬가지. 이성계로 타이틀 롤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연령을 조금 낮춰보면 '꽃중년' 전성시대의 색깔은 더욱 분명해진다. 남자 배우들의 존재감이 큰 한국 영화계는 그야말로 40~50대의 독무대다. 최민식 송강호 황정민 김윤석 이정재 장동건 이병헌 류승룡 등 스크린을 주름잡고 있는 배우들이 속한 연령대. 어느덧 40대 배우에 접어든 이정재는 "남자 배우는 40대에 가장 많은 역할이 들어오는 만큼 기대가 크다. 이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가 된 것 같다"며 오히려 반가움을 표시한다. 차승원 유해진 송일국 등 40대 배우들은 TV로까지 영역을 넓혀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아예 연령대를 더 높여 '노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늘고 있다. 4월개봉을 확정한 강제규 감독의 신작 '장수상회'의 주인공은 박근형과 윤여정이다.

중견배우 전성시대. 이유가 있을까. 우선 연기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는 장 맛과 같다. 묵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경험이 많을수록 잘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 중 하나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문화소비의 폭이 넓어진 시청층의 높아진 눈높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웰메이드' 작품에 대한 기준, '좋은 연기'의 기준이 부쩍 높아졌다. 아이돌을 제외한 새 얼굴의 진입 장벽이 높아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연기를 못한다'는 기준이 엄혹해졌다. 인터넷 상 댓글과 평점을 통한 비판의 정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예전에 외모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대는 지났다. 연기자가 본업인 연기를 못한다는 평가를 듣는 순간 버티기 힘들다. 그만큼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아 묵은 장맛을 내는 중견 연기자들의 연기력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을 수 밖에 없다.

인구 구성비와 소비 구조상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플랫폼의 다양화로 TV 시청층에서 중·노년 시청층 의존도는 점차 커지고 있다. 다양해진 시청 패턴에 맞춰 측정 기준에 변화가 시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방송 수익의 절대 기준은 시청률이기 때문이다. 본방 사수 시청 연령이 높아지면서 그들에게 친숙한 배우들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돈 내고 봐야하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 최근 상업 영화 제작자의 화두는 최대한 넓은 연령대를 소화하기다. 특히 중·장년 층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느냐에 '대박' 여부가 달라진다. 한동안 시대극이 유행한 이유다. 젊은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은 타깃 관객 이상의 파급효과를 내지 못하는 등 한계를 보이고 있다.

대중문화계의 러브스토리의 쇠락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소. 언젠가부터 방송과 영화계에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났다. 미니시리즈는 장르물이 부쩍 늘었고, 영화계에서도 "멜로 영화가 장사가 잘 안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젊은 남녀 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러브스토리의 시들한 인기. 상대적으로 중견배우들을 더욱 바쁘게 하고 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익숙한 얼굴의 중견배우들의 약진.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대중문화계에 젊은 피의 수혈이 줄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이든, 어떤 분야든 새 얼굴의 유입 없이 지속적 발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터. 취업시장과 왠지 닮은꼴 현상. 이 시점에서 '삼포세대',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에 대한 안쓰러움과 씁쓸함이 연상되는 건 부질 없는 비약일까.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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