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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 '82년생 김지영'들은 어디로? 더많은 여성리더가 필요하다

전영지 기자

입력 2019-11-1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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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 '82년생 김지영'들은 어디로? 더많은 여성리더가 필요하다


[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서점가를 강타했던 '82년생 김지영'이 극장가에서도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인기몰이중이다. '한국에서 30대 중반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결혼 후 직장과 육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다 결국은 '꿈 많던 나'도 '좋아하는 일'도 잃어버린 30~40대 여성들의 폭풍 공감속에, 엄마도 딸도 폭풍 오열하며 나온다는 영화다.



'82년생 김지영'에서도 수차례 언급된 '유리천장지수'는 직장내 여성 차별 수준을 수치로 보여주는 지표다.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은 2013~2019년, 7년 내내 최하위를 면치 못했다.

남성 중심의 대표적 조직인 체육계 유리천장은 이보다 더 두텁다. 지난해 1월 여성 빙상국가대표의 충격적인 성폭력 의혹 사건과 이후 봇물처럼 터져나온 '미투 운동' 열기 속에 여성 지도자, 임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었다. 2월, 유승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여성 지도자 30% 할당제'를 골자로 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내놨지만, 9개월이 흐른 11월 현재 이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계류중이다.

▶여성 체육 리더들의 현주소

2019년 11월 기준 대한체육회 등록선수는 12만8602명이다. 이중 여성 등록선수는 2만9638명, 전체의 23%에 불과하지만 국제 무대에서의 성과는 눈부시다. 역대 올림픽에서 여성선수가 따낸 금메달 수는 총 38개, 비율로는 42%에 달한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 21개 중 여성선수가 획득한 메달은 9개, 역시 42%였다.

이토록 뛰어난 여성 체육인재들이 '82년생 김지영'처럼 서서히 '소멸'되는 게 현실이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2019년 대한체육회 여성 임원 비율은 전체 52명 중 8명으로 18.2%에 불과하다. 회장단(회장, 부회장)에는 여성이 전무하다. 현재 체육회 여성 이사는 남윤신 덕성여대 교수, 박선경 용인대 총장, 박지은 대한루지경기연맹 회장, 백옥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신정희 대한하키연맹 부회장, 이은경 현대백화점 양궁 감독, 허태숙 대한스쿼시연맹 회장,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부회장 등 8명이다. 2017년 13.7%보다 4.5% 늘었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분과위원회 여성 비율은 348명 중 86명, 24.7%이다.

시도체육회의 경우 여성 임원은 10명 중 1명 꼴인 11.3%에 불과하다. 세종시가 21명 중 7명(33.3%)이 여성으로 '최다', 경기도가 48명 중 11명(22.9%), 서울이 43명 중 6명(14.0%)으로 뒤를 이었다. 충남은 28명의 집행부 임원 중 여성은 단 1명(3.6%)으로 가장 적었다.

현재 65개 회원종목 단체 가운데 여성이 회장인 종목은 루지, 스쿼시, 롤러스포츠(김영순 전 송파구청장) 등 3종목에 불과하다. 평창올림픽 부단장으로 일했던 박지은 대한루지경기연맹 회장은 "종목도 마이너(minority, 소수자)이고, 성별도 마이너"라고 했다. 경기도에 첫 실업팀을 만들고 강원도 아시안컵, 루지월드컵을 유치하는 등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행정가' 박 회장은 공정한 기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 스스로 양성평등의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대한체육회 이사, 평창 부단장, 세계루지연맹 부회장 등 임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혼자 아무리 열심히 했더라도 이 일들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체육계 유리천장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의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 임원, 지도자 쿼터를 법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선수의 절반은 여성이다. 여성선수의 힘든 점을 이해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은 여성지도자, 여성임원뿐"이라고 강조했다.

▶체육계 '82년생 김지영' 이야기

1983년생 장미란은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다. 2012년 런던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선수 은퇴한 후 스포츠 나눔을 위한 '장미란재단'을 설립했다. 용인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더 큰 배움을 위해 미국으로 훌쩍 떠나 3년째 유학중이다. 1981년생 남현희는 베이징올림픽 여자 펜싱 최초의 메달리스트다. 지난 100회 전국체전을 끝으로 은퇴 후 경기대 대학원에 편입해 석사 논문을 준비중이다. 아테네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수영 선수 최초 본선진출을 이룬 1985년생 남유선 역시 칼럼니스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미래를 착실히 준비중이다.

태극마크를 달고 최초, 최고의 역사를 썼던 30대 철녀들은 여전히 고군분투중이지만 이들을 위한 기회의 문은 좁다. 출산 후 국가대표로 올림픽, 아시안게임에 잇달아 도전했던 남현희는 은퇴 후 30대 여성 체육인으로 살아가는 막막함을 이야기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체육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결혼, 출산 후 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 몸이 힘든 것보다 환경적 부담이 컸다"고 털어놨다. "외국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마흔 넘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다. 나는 내 도전이 여자후배들을 위해 의미 있다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한 결혼한 여성선수들이 설 땅은 여전히 좁다"고 했다. "여전히 공정치 못한 환경이 많다. 사람들은 '오래 했고 잘했다. 대단하다'지만 그게 끝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내야할 환경…, 기회가 보이지 않아 가끔 회의도 든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희망만큼은 놓지 않았다. "펜싱에 아직 여성 감독, 여성 임원이 없다. 언젠가는 내게도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그 기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겠다."

김연아, 이상화, 손연재… . 세계를 호령한 수많은 여성선수들은 대한민국 스포츠계를 이끌어갈 소중한 자산이다. 이 걸출한 여성선수들을 대한민국 스포츠 리더로 성장시키고 활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체육계 유리천장 깨려면…

스포츠 양성평등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최근 가장 집중하는 주제중 하나다. IOC는 2014년 12월 '아젠다2020'을 통해 올림픽 여성참여 비율을 50%까지 끌어올릴 것을 천명했다. 각 NOC에 30% 이상의 여성 임원 비율을 제안하고 있다. 스포츠는 양성평등을 신장시키고 여성과 소녀들의 리더십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파워풀한 플랫폼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성의 스포츠 참여가 여성 리더십의 확대, 양성평등으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IOC가 '여성과 스포츠' 상을 제정, 롤모델이 될 만한 대륙별 여성 스포츠 리더들을 선정해 시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역시 여자축구에 4년간 10억 달러(약 1조2000억 원) 투자를 약속하고,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이웃 일본 역시 올림피언 출신 여성 체육인재를 적극 양성하고 지원한다.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을 진두지휘하는 일본 올림픽담당장관은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 여성 최초 메달리스트 하시모토 세이코(1500m 스피드스케이팅)다.

체육계 여성임원-지도자 30% 할당제의 법제화도 시급하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여성 체육인들 역시 기회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 일부에선 남성 체육인에 대한 '역차별'을 염려한다. '당장 시킬 사람이 없다'는 푸념도 나온다. 자격과 능력이 안되는데 '무조건적인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체육의 절반으로 함께 땀흘려온, 올림픽 메달의 40%를 책임져온 체육계 여성 리더들과 적어도 '공정한 기회' '성장할 무대'를 공유하자는 얘기다. 당장은 준비기간, 비용, 시행착오, 불편함이 따르더라도 내 딸일지 모를 '체육계 김지영'들을 위해 가야할 길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82년생 김지영' 중)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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