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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막말 듣고 올림픽 금메달 딴 신준섭

최재성 기자

입력 2018-02-2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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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막말 듣고 올림픽 금메달 딴 신준섭
◇83년 광주 대통령배에서 메달을 따고 포즈를 취한 신준섭(왼쪽)과 필자.

<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3. 스승에게 막말 듣고 올림픽 금메달 딴 신준섭



며칠전 필자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이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신준섭(56) 선배였기 때문이었죠. 신선배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터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문득 80년대 초반 전북대표로 전국체전과 대통령배에서 같이 뛰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군요. 신선배는 정말 보고 싶었던 복싱인이었죠. 벅차오르는 희열을 진정시키면서 통화를 하니 문득 어느 전직 대통령의 '간절히 원하면 전 우주가 도와준다'는 시니컬한 멘트가 떠오름과 동시에 피그말리온이란 효과가 갑자기 생각나더군요.

필자가 신준섭(편의상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을 이 코너에 여느 복서보다 더 등장시키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가 걸어온 복싱파노라마가 후배 복서들에게 꿈이 되고, 희망이 되고, 길잡이가 되는 참고서 역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죠. 필자가 신준섭을 존경하는 이유는 많은 국제대회에서 연전연승하며 강한 임팩트를 심어준 세계적인 복서라서가 아니라 수많은 패배와 좌절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최후에 웃는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준섭은 남원에서도 오지중의 오지인 대산면 길곡리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남원은 신라시대엔 지금으로 말하면 광역시급인 5소경의 하나였고, 고려 우왕 때는 삼남을 휩쓸고 이곳에서 노략질하던 왜구를 맞이하여 이성계와 여진족 출신 이지란이 투톱을 이뤄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면서 왜구를 격퇴한 그 유명한 황산대첩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입니다.

신준섭은 80년 4월 남원농고 2학년 때 복싱에 입문합니다. 만 18세의 한참 늦은 나이였죠. 어설프게 권투를 배운 지 3개월 만에 군산으로 원정 스파링을 떠난 신준섭은 군산제일고 2학년인 김의진과 스파링을 하다가 강타를 허용하고 그만 속칭 '떡실신'을 하고 맙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에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건 거죠. 김의진은 82년 아시아선수권 라이트미들급에서 금메달을 따낸 강펀처였죠.

복싱 초년병 신준섭은 그 후에도 소배원, 최우진, 조주연 등 훗날 국가대표로 활약한 전북 출신 베테랑 선배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면서 내구력에 균열이 생겼고, 선수로서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죠.

그해 8월 전주에서 벌어진 전국체전 선발전 때도 선발 가능성이 없음을 감지한 소속체육관에서 아무도 오질 않아 친동생이 세컨드를 볼 정도로 암울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대는 전북체고의 김공근이라는 중견 복서로, 신준섭에 비해 경험이나 실력면에서 앞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지닌 선수였죠. 이 경기서 촌놈 신준섭은 필사즉생의 신념으로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고 극적으로 판정승하면서 전국체전 티켓을 확보합니다.

신준섭의 승리에는 당시 심판부장이었던 고 탁형권 관장의 영향력이 컸죠. 이 분은 전주 출신이었지만, 공명정대한 판정으로 촌놈 신준섭의 손을 들어줬죠. 아마 그때 그 경기에서 패했더라면 신준섭의 복싱 역사도 거기에서 종결됐을 거란 생각을 해봤을 정도로 신준섭에게 그 경기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죠. 신준섭은 그해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희미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해를 넘겨 81년 신준섭은 학생선수권 우승과 함께 그해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 중견복서로 발돋움했지만, 체전이 끝나고 축구를 하다가 그만 큰 부상을 입는 시련을 당합니다. 대학 진학의 문턱에서 마음을 추스를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호박을 구해다가 자취방에서 다리를 가지런히 벌리고 두 손으로 호박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상체 근육을 발달시켰죠. 당시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죠.

우여곡절 끝에 82년 원광대에 입학한 신준섭은 처녀출전한 핀란드 템머대회에서 복싱의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국가대표 2진으로 참가한 대회였지만, 통 큰 김승현 회장은 덴마크, 스웨덴 등 5개국 전지훈련을 감행했는데 무려 1개월에 걸친 긴 레이스였다고 하네요. 신준섭은 공식, 비공식으로 3차례 경기를 펼쳤지만, 유럽 선수들의 강타에 처참하게 얻어터지면서 3차례 모두 RSC로 패하는 지독한 성장통을 겪습니다.



그때 국제심판으로 참관한 신준섭의 스승 고 조석인 회장은 제자가 국제대회에서 연달아 RSC로 패하는 망신을 당하자 급기야 선수단이 모인 자리에서 신준섭을 향해 "너는 선수 되기 틀렸다. 만일 선수가 된다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는 충격적인 말을 쏟아냈습니다. 신준섭은 그말을 듣고 비통한 심정으로 굳게 다짐했죠. '스승의 그 말이 잘못됐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그리고 그해 겨울 남원에서 이를 악물고 지리산의 험준한 산줄기를 오르내리면서 결사항전을 다짐합니다. 힘이 들 때면 스승님의 충고(?)를 잊지 않고 맘을 추슬렀죠. 이 말은 당시 템머대회에 같이 참석했던 고희룡 현 제주도복싱연맹 부회장의 전언입니다.

그해 1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안영수(한국체대)를 RSC로 꺾으며 처음으로 대표팀에 승선했고,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서 우승하며 LA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예비고사'를 통과한 후 '본고사'인 LA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자 초인적인 역량을 발휘합니다.

신준섭은 츄리닝을 입은 채 잠을 잤습니다. 왜냐고요? 새벽 4시에 소리 소문 없이 일어나 홀로 로드워크를 하기 위해 미리 전투준비(?)를 한 상태로 잠자리에 든 것이죠. 그리고 6시에 대표팀 선수들과 새벽 합동훈련을 할 때면 선두에서 독주하는 문성길을 따라잡기 위해 또다시 필사적으로 뜀박질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단 한 차례도 문성길을 추월한 적은 없지만 신준섭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거죠.

신준섭은 아침식사 후 오전운동을 시작했고, 오후 정규 트레이닝이 끝나면 당시 새로 부임한 미국인 코치에게 새로운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하며 기량을 향상 시켰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취침하는 야간에까지 홀로 트레이닝을 하는 등 당시 동료였던 문성길이 '지독한 놈'이라 표현할 정도로 하루 5차례나 강훈을 하면서 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매진했죠.

"준섭이 저놈은 선수되기 틀렸다"는 스승의 쓰라린 악담을 소중히 가슴에 간직하며 '당신의생각이 틀렸다는 걸 몸소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던 신준섭의 강한 정신력은 자라나는 후학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이미 대한체육회 자체평가에서 양궁의 김수녕과 유도의 하형주, 그리고 복싱의 신준섭은 금메달이 유력하다고 분석했죠. 사실 중량급은 한국인의 체형으로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메달을 획득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였죠. 오죽하면 박태식이라는 대표팀 코치는 "한국복싱이 웰터급 이상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건 힘들다"면서 선수들 앞에서 푸념을 했을까요.



하지만 신준섭은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모든 난관을 스스로 헤쳐나가면서 복싱사에 큰 획을 긋는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죠. 금메달 획득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신준섭에게 미국에 저명한 복싱프로모터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요지는 물경 1억원에 스카우트를 타진하는 러브콜이었죠. 당시 영어를 모르던 신준섭을 대신해 통역을 해준 이는 탁구선수 양영자의 친오빠였죠. 하지만 대학교수직을 염두에 둔 신준섭은 고사했죠. 은퇴 후 신준섭은 모교인 원광대 강사를 거쳐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과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됐고, 전담으로 지도하던 이승배가 금과 은을 획득하면서 국위를 선양하는데 일조했죠.

신준섭의 조련을 받은 고영삼(호남대)은 언젠가 필자에게 "신준섭 선생은 선수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는 진정한 참스승"이라고 회고하면서 "그의 이탈(미국 이민)은 한국복싱의 큰 손실"이라고 역설했습니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대표팀 코치로 참가한 신준섭은 미국시민권을 보유한 한 미모의 한국여성을 운명처럼 만나 이듬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죠. 20년이 훌쩍 흐른 지금은 조지아주에 아담한 저택도 마련했고, 억대의 수입을 창출하는 반듯한 사업가로 변신해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신준섭은 운동할 때 인연을 맺었던 동료 복싱인 임창용, 강상선 두 선배를 보자 반색하면서 옛 추억을 더듬더군요. 신준섭은 슬하에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47세에 늦둥이 딸이 태어나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욱더 기뻤다고 회고했습니다.

신준섭의 6년간의 선수생활은 '강한 신념과 의지는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다'는 생생한 교훈을 던져준 하나의 강렬한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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