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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이슈]이청용이 던진 화두, 이제 희생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박찬준 기자

입력 2019-01-20 03:50

수정 2019-01-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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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이 던진 화두, 이제 희생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한국과 키르기스스탄의 2019 AFC 아시안컵 C조 조별리그 2차전이 11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알 아인 하자 빈 자예드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돌파를 시도하는 이청용의 모습. 알 아인(아랍에미리트)=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19.01.11/

[두바이(아랍에리미트)=박찬준 기자]전쟁의 아픔을 겪었던 한국은 짧은 시간 엄청난 성장을 거뒀다.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강조됐던 이야기가 '대의'다. 성장이란 '대의' 아래, '소의'가 설 자리는 없었다. 희생을 강요받았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는 국위선양의 선봉이었다. 외국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 애국이었고, 우리는 그 승리에 열광했다. 때문에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에게는 '대의'가 더욱 강조됐다. 승리를 위한 '선수'만 있었지, '개인'은 없었다. 이 같은 기조는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운동선수에게는 항상 '희생'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9일 오전(한국시각) 아랍에미리트(UAE) 현지에서 취재하던 기자단에 대한축구협회의 메시지가 날라왔다. '블루드래곤' 이청용(보훔)이 가족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다는 것. 독일에서 부활한 이청용은 다시 대표팀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했다. 필리핀과의 1차전에서 후반 투입돼 맹활약을 펼친 이청용은 이후 키르기스스탄, 중국전에 선발출전했다. 그런 핵심 선수가 대회 중간, 부상이 아닌 개인적 사유로 팀을 잠시 비웠다. 지금까지 대표팀에 없었던, 놀라운 소식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에서 국가대표팀은 특별한 의미다. 늘 전체가 우선이었다. 그 속의 개인은 헌신하고, 희생해야 했다. 개인의 삶이 점점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지만, 선수는 예외였다. 아마도 수십년 동안 수없이 많은 선수들이 침묵했을 것이다. 희생은 투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를 깬 이청용의 용기가 놀랍고, 반갑다.

전례가 없던 일인만큼, 이청용도 조심스러웠다. 일단 대표팀의 상황을 지켜봤다. 한국은 중국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2대0으로 승리하며 조1위를 확정했다. 대표팀은 16강까지 6일간의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조2위였다면 다음 경기까지 4일 밖에 남지 않았다. 한국행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청용은 조1위를 확정지은 중국전이 끝나고, 곧바로 파울루 벤투 감독을 찾아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한국행 의사를 전했다. 동생을 끔찍히 아끼는 이청용에게 여동생의 결혼식은 특별한 날이었다. 게다가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만 함께하는 스몰 웨딩이었다.

이를 들은 벤투 감독은 곧바로 대한축구협회에 문의를 했다. 처음에는 협회 내부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자칫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역풍을 맞을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벤투 감독과 선수의 의견을 존중해, 최종적으로 한국행을 허락했다.

포르투갈 출신인 벤투 감독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지 않다. 유럽 축구는 중요한 대회나 경기를 앞두고 경조사가 생긴 선수를 보내주는게 일반적이다. 오히려 독려한다. 아마 다른 유럽 출신 감독이 한국 지휘봉을 잡았더라도 이청용을 보내줬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허락을 해준 벤투 감독이 아닌, 그 말을 꺼낸 이청용에 더 주목하고 싶다.

10년 넘게 대표팀에 몸담으며 그 문화가 어떤지 누구보다 더 잘아는 이청용이다. 진중하고, 사려깊은 이청용의 평소 성격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혹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여동생의 결혼식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얘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청용의 용기가 오래된 대표팀의 금기를 깼다는 것이다. 뭐든지 시작이 가장 어렵다.

결혼식에서 돌아온 이청용이 바레인전에서 펄펄 날았으면 좋겠다.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극마크의 무거움 속 언제나 경직됐던 대표팀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 이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조하던 시대는 지났다. 우승이라는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안에 개인의 행복도 중요하다. 그래서 이청용의 용기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김영권(광저우 헝다)의 말을 들으면 이미 변화는 시작됐는지 모른다. "놀랐지만, 이게 맞는거죠. 대회 기간 중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면요? 어떤 대회든, 어떤 기간이든 당연히 가야죠.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없잖아요."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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