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은 이날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신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오늘 새벽 위독해져서 병원으로 와 오후 5시 23분쯤 임종하셨다"며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까지 아프셔도 꾸준히 사무실에 나가 그림을 계속 그리셨다"고 말했다.
고인은 1939년 충청남도 천안 출생으로,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창 시절에 캐리커처를 그린 경험을 살려 만화가가 됐다. 동아일보 투고를 계기로 1963년 한 해 동안 신문·잡지에 투고했으며 그해 만화 '카이젤상사'로 등단했다.
신 화백은 1964년 당대 최고 만화가였던 길창덕 선생의 추천을 받아 만화잡지 '로맨스'에 '너구리 형제'의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도깨비 감투' '로봇 찌빠' 등 히트작을 내며 꾸준히 명랑만화를 그렸다. 주로 어린이 신문과 잡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명랑만화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특히 대표작 '로봇 찌빠'는 1979년 6월부터 14년간 '소년중앙'에 연재됐고, 단행본만 10권 이상이 나왔다. 이 작품은 길창덕 화백의 '꺼벙이',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과 더불어 한국 명랑만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로봇 찌빠'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비롯해 모바일 게임으로도 나왔으며 후배들에 의해 웹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고인은 1977년 한국창작만화가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 만화가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한국만화가 협회 자문위원, 한국만화 100주년 행사 준비위원, 경기도 콘텐츠기업협의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