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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었다면 50세"... 커트 코베인을 잊지못하는 이유

전영지 기자

입력 2017-02-21 11:23

수정 2017-02-2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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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었다면 50세"... 커트 코베인을 잊지못하는 이유
ⓒTOPIC/Splash News

'왜 우리는 여전히 커트 코베인을 사랑하는가.'



영국 BBC는 21일(한국시각)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6가지 이유'라는 타이틀하에 커트 코베인를 추모하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2월 20일, 살아 있었다면 50세를 맞았을 고(故) 커트 코베인의 생일이었다.

1967년 2월 20일에 태어나 1994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밴드 '너바나'의 싱어, 커트 코베인은 2017년에도 여전히 음악하는 이들의 우상이자, 팬들의 스타다. 금발에 텁수룩한 수염, 우수에 찬 깊은 눈빛부터 저항적이고 탁월한 음악성까지 그는 1990년대 청춘의 아이콘이다. 1992년 록그룹 '홀'의 가수이자 배우였던 코트니 러브와 결혼 2년만인 1994년 4월 시애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닐 영의 '헤이, 헤이, 마이 마이 (인투 더 블랙)(Hey Hey, My My (Into The Black)' 가사인 '서서히 소멸되는 것보다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게 낫다(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는 유서를 남긴 채. 그의 50세 생일을 맞아 딸 프란시스 빈 코베인은 SNS를 통해 생일 카드를 공개했다. "오늘이 아빠의 50번째 생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모두들 아빠를 사랑하고 그리워해요. 제게 인생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감사해요. 영원한 당신의 딸.'

'트럼프의 시대'를 사는 팬들은 생전 그가 했던 명언을 공유하며 그를 추모했다. "여기 있는 여러분중 동성애를 혐오하거나 유색인종이나 여성에 대해 차별적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해달라. 우리 콘서트에 오지 말아달라. 우리 음반을 사지 말아달라."

아래는 BBC가 분석한 커트 코베인의 매력, 시대를 막론하고 전세대적인 사랑을 받는 까닭, 우리가 그를 잊지 못하는 6가지 이유다.

①반차별주의적 태도, 시대를 앞서갔다

커트 코베인은 동성애자의 권리를 소리높여 주장했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 세상의 모든 '주의'에 반대하고 저항했다. 동성애 혐오, 남성우월주의자들을 향해서도 할 말을 분명히 했다. "나는 내가 동성애자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때로는 여장을 통해 성차별주의자들에게 저항했다. "공연에서 드레스를 입으면 내가 원하는 만큼 여성적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이성애자만 내가 동성애자였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차에 '하나님은 게이였다(God is gay)'라는 발칙한 문구를 페인트로 써넣는가 하면, 이 문구를 벽에 낙서해 연행되기도 했다.

② 무심해서 더 '쿨(cool)'했던 '쿨'의 표본

코베인은 1991년 인터뷰에서 "뭐가 얼터너티브(대안)인가, 뭐가 반체제, 반문화인가? 뭐가 쿨한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신경 안쓴다"라고 했다. "만약 쿨한 걸 좇는 게 중요하다면 당신은 바보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세상이 말하는 대중적 성공에 목숨 걸지 않았다. "나는 야망이나 물질적 성공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다. 결코 멋져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엄청난 밴드가 되려고 기를 쓰지도 않는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다."

③그의 음악은 전세대에 영감을 줬다

전세계적으로 너바나와 그들의 정신이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차라리 너바나가 영향을 주지 않은 밴드의 리스트를 뽑는 것이 빠를 정도. 라나 델레이, 블링크-182, 저스틴 팀버레이크, 제이지까지 자신의 가사에 너바나의 음악을 언급했다. 얼터너티브 음악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너바나는 바이블이다. 명곡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은 교과서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처음 연주하는 입문곡이자, 누구나 한번쯤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커트 코베인은 1991년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악에 대해 기술적인 것은 전혀 모른다. 왜 이 사운드를 저 사운드와 함께 뒤섞으면 안되는가. 내가 아는 것은 오직 어떤 소리가 우리에게 듣기 좋은가 하는 것뿐이다. 밴드로서 나와 우리는 절대 결코 남의 것을 베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곡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도 않는다. 그렇게 잘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인내심도 없다. 그럴 에너지를 차라리 우리 자신의 것에 쏟는다. 자신의 플레이를 통해 배우는 학교, 우리는 그 학교 출신이고 여전히 그 학교를 다닌다."

④그의 공연은 전설이었다

너바나의 공연을 라이브로 지켜본 이는 행운이다. 그의 공연은 독보적이고 정직했고 재기발랄했다. 1991년 공연 때 사전녹음 트랙을 틀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커트 코베인은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을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가사도 바꿨다. 오직 기타 사운드 하나에 의지했다. 라이브에서 이곡을 잘 연주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집중도는 훨씬 더 올라가는 효과를 냈다.

1992년 연인 코트니 러브와 프란시스 빈을 낳은 직후엔 불화설이 돌았다. 커베인은 무대에서 휠체어를 타고 환자복을 입은 채 무대에 올라 언론들을 향해 손가락 두개를 들어올렸다.

⑤ 오늘날까지 울림을 주는 명언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그는 전설이 됐다. 그가 남긴 수많은 명언들은 아직까지 팬들 사이에 회자된다. "청춘의 의무는 부패에 도전하는 것이다(The duty of youth is to challenge corruption)" "나는 존 레논을 향한 존경과 링고스타의 익명성을 함께 갖고 싶다." "어느 누군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낭비다.(Wanting to be someone else is a waste of who you are.)"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랑받을 바에는 본연의 내 모습 때문에 미움받는 게 낫다."

⑥ 미래를 겨냥한 너바나의 마지막 앨범

커트 코베인의 사후 출시된 MTV 언플러그드 콘서트 앨범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라이브 음반으로는 사상 유례없는 빅히트를 기록했고 세대를 지나 오래 사랑받는 앨범으로 남았다.

스튜디오에서 어쿠스틱한 컨셉트로 밴드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당시 이례적인 도전이었다. 백합에 둘러싸인 채 헐렁한 카디건 차림의 코베인이 기타 하나로, 대중의 귀에 익숙치 않은 곡들을 아름답게 연주해냈다. 밴드의 미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너바나의 베이시스트 크리스트 노보셀릭은 "나 역시 그 언플러그드 공연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커트 역시 정말정말 행복해했다"고 귀띔했다.

커트 코베인은 "그런지 로커보다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것도 멋질 것같다. 내가 더 늙었을 때는 그 편이 훨씬 좋을 것같다"고 했다.

불행히도 우리는 '늙은' 커트 코베인의 음악을 알지 못한다. 만약 코베인이 50세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추구했을 음악의 방향성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따름이다. 커트 코베인은 스물일곱,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남았다.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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