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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레이서'유병훈과 2000년대 아이들,휠체어육상 다시 희망 달린다[진심인터뷰]

전영지 기자

입력 2021-11-04 16:55

수정 2021-11-0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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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레이서'유병훈과 2000년대 아이들,휠체어육상 다시 희망 달린다
'휠체어육상 현역 레전드''유병훈(가운데)이 지난달 23일 경북 구미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진 전국장애인체전 남자 400m 계주 경기 직후 2000년대생 꿈나무 후배 박윤재(왼쪽), 이종구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장애인체육회

지난 여름 '휠체어육상 레전드' 유병훈(49·경북장애인체육회)은 도쿄 하늘 아래 외롭고 높고 쓸쓸한 레이스를 치렀다. 27년의 선수생활, 4번째 패럴림픽. 나홀로 쿼터를 확보한 도쿄패럴림픽에서 휠체어육상 100m 단거리부터 마라톤까지 전종목에 도전했다. 아쉽게 메달을 놓쳤지만 지천명의 나이에 한계에 도전한 불굴의 레이스는 아름다웠다. 유병훈은 믹스트존 인터뷰 때마다 휠체어육상의 열악한 현실, 꿈나무 육성의 필요성, 선배의 책임감을 역설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지난달 23일, 경북 구미 전국장애인체전 현장에서 '경북 대표' 유병훈을 다시 만났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계주 레이스를 막 끝낸 2000년대생 후배 박윤재(21·안산시장애인체육회)와 이종구(18·서울 불암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훈훈했다. 중학교 3학년 박윤재를 발굴하고 키워낸 유병훈의 국가대표 후배, 박정호 안산시장애인체육회 육상 감독도 함께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휠체어육상의 미래를 향했다.

유병훈은 "두 선수 모두 착실하고 욕심도 많고 열심히 하는 친구"라고 소개했다. 2년만에 개최된 전국체전, 2000년생 박윤재는 금메달 2개(T54 800-5000m), 은메달 2개(1500m, 400m 계주)를 목에 걸었다. 2019년 첫 체전 800m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걸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2003년생 꿈나무' 이종구는 올해 개인전에서 메달을 놓쳤다. 단체전인 계주에서 서울팀에 금메달을 선물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하지만 개인전 금메달을 딴 선수도, 놓친 선수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했다. 박윤재는 "안산와~스타디움에서 축구 A매치가 열리면서 마무리 트랙 훈련을 하지 못했다. 기록이 불만족스럽다"며 아쉬워 했다. 고등학생 이종구 역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행사가 많았고, 학업도 병행하느라 훈련을 많이 못했다"고 털어놨다. 박윤재와 이종구는 "도쿄패럴림픽 때 유병훈 선배님과 외국선수들을 보면서 이 정도로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3년 후 파리를 목표로 더 열심히 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홍석만, 김규대, 유병훈 등 휠체어육상 레전드 선배들의 이름을 줄줄이 떠올리자 박윤재와 이종구는 한목소리로 "그래서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고 했다. 박윤재는 "선배님들을 엄청 존경하고 동경하고 있다. 아직은 따라가기 버거운 존재지만 반드시 따라잡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종구 역시 "유병훈 선배님의 장점을 따라가면서 결국 제칠 수 있는 선수가 얼른 돼야 우리 휠체어육상이 발전한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 후배들의 겸손하지만 당찬 도전장에 유병훈이 흐뭇한 선배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다. 나도 선배들이 있었고, 이 후배들과 똑같은 시절을 거쳤다. 똑같이 스타트 하는데 뒤따라갈 수가 없었다. 선배 한분 한분을 따라잡아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시간이 지나니 한분 한분 이기게 됐다. 이 친구들도 그때의 나와 똑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것 아닐까"라며 공감했다.

꿈 많은 Z세대 선수들에게 휠체어육상은 어떤 의미일까. 이종구는 "친구"라고 즉답했다. "부모님께 못하는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는 게 진짜 친구다. 휠체어육상을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었다. 내 안의 감정들도 꺼내보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윤재는 "내게 휠체어육상은 새 삶"이라고 답했다. "나도 내향적이었다. 박정호 감독님을 만나고 꿈이란 걸 갖게 됐다. 없던 꿈, 패럴림픽이라는 큰 꿈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애제자의 고백에 '현장 지도자' 박정호 감독이 도쿄패럴림픽을 보며 가슴속에 품었던 응어리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한국은 아시아의 휠체어육상 전통의 강국으로 통했다. 1988년 서울패럴림픽 육상 종목을 통틀어 16개의 금메달을 따낸 후 2000년 시드니에서 문정훈(T54 400m), 2004년 아테네에서 홍석만(2관왕·T53 100-200m), 2008년 베이징에서 또 홍석만(T53 400m)이 3회 연속 금맥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에선 김규대가 동메달(T54 1500m)을 따냈고, 2016년 리우에선 또다시 동메달 2개(T54 800m, 마라톤)를 보탰다. 도쿄에서 '백전노장' 유병훈이 고군분투했지만, 21년만에 처음으로 휠체어육상의 메달 계보가 끊겼다. 박 감독은 "유병훈 선수 혼자 패럴림픽을 치렀다. 경기를 보면서 '형이 진 게 아니야, 이건 우리나라 휠체어육상이 진 거야'라고 되뇌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최선을 다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형에게 너무 큰 짐을 줬다. 왜 저게 혼자의 짐이어야 하는지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고 털어놨다. 박 감독이 지도자로서 현장에서 꿈나무 발굴과 양성에 전력을 투구하는 이유다.

'한국 휠체어육상의 희망' 이종구와 박윤재는 대선배들의 기대에 걸맞은 선수로서의 꿈을 노래했다. 이종구가 "내 꿈은 패럴림픽 마라톤에서 한국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유병훈 선배님께 많은 정보를 받고 싶다"고 하자, 박윤재가 "저는 패럴림픽 3관왕이 목표다. 3년 뒤 파리를 목표 삼고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유병훈이 아들뻘 후배들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봤다. "이 후배들과 빨리 짐을 나눠 졌으면 한다. 계주 바통터치 하듯이…"라며 싱긋 웃었다. "파리 때 함께 웃자"는 덕담에 유병훈과 박 감독은 베테랑다운 내공, 긴 호흡으로 화답했다. 선배들은 후배들이 휠체어육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오래오래 지치지 않고 도전하길 바랐다. "파리가 안된다면 LA도 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게 중요하죠. 마라톤처럼." 구미(경북)=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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