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이순간]'곰탈 쓴 여우' 잡은 한화 정은원의 예리한 플레이, 패배 속 핀 꽃

[창원=스포츠조선 박상경 기자] 16일 창원NC파크.

4회초 1-1 동점을 만든 한화 이글스는 위기에 빠졌다. 첫 이닝 실점 뒤 안정감을 찾아가던 장시환은 1사 2, 3루의 위기를 맞았다. 장시환은 노진혁을 상대로 2루수 땅볼을 유도했다. 주자들이 모두 스타트를 끊은 상황에서 한화는 그렇게 아웃카운트와 실점을 맞바꿀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에서 정은원은 홈으로 스타트를 끊은 양의지를 바라봤다. 멈칫하던 양의지가 귀루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정은원도 공을 쥔 채 발걸음을 옮겼고, 다시 홈을 향하는 듯 했던 양의지는 재빨리 3루로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쇄도하던 정은원이 3루로 강하게 송구했고, 3루수 박정현은 슬라이딩하던 양의지에게 글러브를 갖다댔다. 결과는 아웃. 벤치로 들어온 양의지는 허를 찔렸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정은원의 수비로 실점 위기를 넘긴 장시환은 2사 1, 2루로 바뀐 상황에서 권희동을 뜬공 처리하면서 동점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양의지는 '곰의 탈을 쓴 여우'로 불린다. 큰 덩치에 수더분한 인상으로 포수 마스크를 쓰고, 타석에선 수수함을 넘어 기술이 없어 보일 정도로 쉽게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러나 상대 타자의 약점을 속속 꿴 신들린 리드 뿐만 아니라 4번 타자 역할을 맡을 정도로 엄청난 생산성을 자랑한다. 기량은 기본이요, 영리한 두뇌 플레이도 KBO리그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이런 양의지를 상대로 정은원이 수 싸움 끝에 만들어낸 아웃카운트는 돋보일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수비'는 올 시즌 한화 지휘봉을 잡은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의 강조 사항 중 하나다. 벤치의 지시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플레이를 넘어 타자 성향, 경기 상황 등을 고려해 선수들이 능동적으로 수비에 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타순에 따라 바뀌는 시프트도 이런 노력의 결실. 이날 정은원의 플레이는 한화의 '생각하는 수비'가 서서히 선수들 사이에 녹아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