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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감독의 믿음, 박기원의 '자율배구학 개론'

임정택 기자

입력 2017-12-0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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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감독의 믿음, 박기원의 '자율배구학 개론'
사진제공=한국배구연맹

"스스로 이겨내야죠. 그게 자율배구입니다."



지난 2일 대한항공은 '악몽' 같은 밤을 보냈다.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했다. 이날 삼성화재와 맞붙은 대한항공은 5세트 14-9로 매치포인트를 선점, 승리를 코앞에 뒀지만 뒤집힌 채 추락했다. 대한항공은 V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극의 희생양이 됐다. 7일 수원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전력과의 2017~2018시즌 도드람 V리그 남자부 경기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박기원 대한항공 감독(66)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삼성화재전만 빼고 다 물어봐요."

하지만 어찌 그 '대사건'을 빼놓고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을까. 박 감독은 "다른 무슨 말이 더 있겠나. 5세트 14-9에서 진 건 말 그대로 대형사고"라고 했다. 잠시 흐른 정적. 안경을 고쳐 쓴 박 감독이 고요함을 깼다. "그런 상황에선 감독이 따로 할 말이 없다. 선수 본인들은 또 얼마나 안타깝고 상심이 크겠나."

박 감독의 이 말이 '자율배구학 개론'의 첫 장이었다. 고개 숙인 선수들에게 다른 말은 필요없다는 게 박 감독의 지론. 아픔을 나누고, 듬직하게 뒤에 서있는 것. 박 감독이 생각한 최선이었다.

하지만 벼랑에 선 선수들을 그대로 두는 건 또 그것대로 문제가 아닐까. 소위 '직무유기'와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박 감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프로에선 감독이 스트레스를 나누면 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해내는 건 결국 선수들의 몫"이라고 했다.

모두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 감독은 "어려움을 통해 아픔을 느끼고,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 이겨내는 것. 이게 진정한 '자율배구'아닌가"라며 "선수들이 직접 떨쳐내야 한다. 모두 그만한 경력이 있고, 그만한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선수들에 대한 신뢰 하나로 한국전력전을 준비했다. 박 감독은 시즌 초 공언했던대로 체력 안배 차원에서 김학민 한선수 등 주축 선수들을 선발에서 제외했다. 리그 후반 약진을 노리는 구상. 박 감독은 "김학민 한선수 모두 준비는 됐지만, 당초 우리 계획대로 선발에 세우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전력은 분명 부담스러운 상대다. 박 감독은 "(선수들이)자신감을 가져야겠지만 힘든 시합이 될 것"이라며 "볼 하나하나 우리 손으로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선수들이 박 감독의 '자율배구학 개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덕일까. 대한항공은 이날 숱한 고비에도 무너지지 않고 '난적' 한국전력을 세트스코어 3대1(23-25, 25-19, 25-21, 25-21)로 꺾고 승점 22점을 기록, KB손해보험을 끌어내리고 단독 3위에 자리했다. 가스파리니는 트리플크라운(서브 득점, 블로킹, 후위 3개 이상)을 포함, 총 36득점을 기록했다.

박 감독은 "이제 어영부영할 시간은 지났다. 진짜 제대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제부턴 그 어떤 이유나 변명도 필요없다. 오로지 결과로만 말해야 한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환갑을 한참 넘긴 '노(老)감독' 박기원이 쉰 목소리로 "항공!"을 작전타임마다 부르짖는다. 쇳소리 섞인 '노교수'의 외침에 학생들이 답해야 할 시점이다.

수원=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

◇2017~2018시즌 도드람 V리그 전적(7일)

▶남자부

대한항공(7승7패) 3-1 한국전력(5승9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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