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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빅 샘'을 무너뜨린 14시간의 기록

이건 기자

입력 2016-09-28 07:00

수정 2016-09-28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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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샘'을 무너뜨린 14시간의 기록


[런던(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잉글랜드 축구에게 27일(현지시각)은 숨가쁜 하루였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어서자 '이 사건'이 시작됐다. 그리고 오후 8시가 조금 안된 시각, 결론이 나왔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는 샘 앨러다이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사실상 경질이었다. '빅 샘'을 무너뜨린 14시간이었다.



▶오전 6시-폭탄 보도, 잉글랜드를 흔들다

오전 6시 17분이었다. 영국 일간 데일리 텔래그래프는 특종 기사를 하나 냈다. 앨러다이스 감독에 대한 기사였다. 6시 17분은 온라인판에 기사를 올린 시간이다. 가판대에도 신문이 깔렸다. 1면에 앨러다이스 감독의 얼굴을 크게 실었다. 제목은 쉽고 간단했다.

'잉글랜드 감독을 팝니다(England manager for sale)'

텔레그래프 탐사보도팀이 '만들어낸' 특종이었다. 텔레그래프는 1면에서 5면까지 이 이야기를 실었다.

8월 앨러다이스 감독은 런던의 한 호텔에서 '아시아의 한 축구 회사 에이전트'와 만났다. 그는 잉글랜드 이적 시장에서 수익을 내고 싶다고 했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탐욕에 눈이 멀고 말았다. 서드 파티 오너십(제3자가 소유권을 갖고 선수를 거래하는 방식)을 피해가는 편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는 서드 파티 오너십을 2008년 5월부터 금지했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서드파티 오너십을 이용하는 에이전트를 알고 있다"고 했다. 자문료로 40만파운드(약 5억7000만원)를 달라고까지 제안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이 '에이전트'와 한 번 더 만났다.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전임 로이 호지슨 감독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다"고 했다. 게리 네빌 코치에 대해서는 "잉글랜드 축구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비난했다. FA에 대해서는 "웸블리 재건축 결정을 했다. 이는 멍청한 짓"이라고 했다.

이 '에이전트'가 바로 텔레그래프의 탐사보도팀 일원이었다. 텔레그래프는 보도를 내기 전 FA와 앨러다이스 감독에게 답변요청서를 보냈다. 둘다 답이 없었다. 결국 텔레그래프는 취재내용을 터뜨렸다. 온라인판에는 앨러다이스 감독과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긴 '몰래카메라'까지 올렸다.

'더 선'도 동참했다. 텔레그래프가 FA에 질의서를 보낸 사실을 알아냈다. 더 선도 앨러다이스 감독의 부패 스캔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어 다른 매체들도 보도에 동참했다. 이제 관심은 앨러다이스 감독과 FA의 행보로 모아졌다.

▶오전 11시-FA회장 "신중해야 한다"

FA는 취재진들의 질문 요청에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내부적으로 발빠르게 움직였다. 사실 관계 확인에 들어갔다. 오전 10시 즈음이었다.

이미 경험은 있었다. 2006년 1월 '뉴스 오브 더 월드(2011년 폐간)'는 비슷한 보도를 했다. 아랍인 거부로 위장해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을 이끌고 있던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을 만났다. 에릭손 감독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뒤 나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그만둘 것"이라며 "당신이 애스턴 빌라를 인수하고 나를 감독에 앉히면 데이비드 베컴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이 보도는 엄청난 논란을 낳았다. 결국 FA는 '2006년 월드컵이 끝난 뒤 에릭손 감독은 대표팀을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FA는 조사를 시작했다. 이미 몰카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위장 잠입 취재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앨러다이스 감독의 발언들이 너무 강력했다. 빼도박도 못할 명백한 증거였다. FA는 사실 관계 확인보다는 계약 내용 및 규정 위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규정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오전 11시 그렉 클라크 FA회장의 공식 반응이 나왔다.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전화를 받았다. 오늘 일어난 이 사건의 팩트에 대해 알고 싶다. 찬찬히 검토할 것이다. 지금 현시점에서는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신중함이 경솔한 판단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앨러다이스 감독의 현황 보도가 나왔다. 11시 30분 경이었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오전 7시 볼턴에 있는 집을 나섰 것으로 확인됐다. 그가 향한 곳은 웸블리였다. 웸블리에는 FA가 있다. 거기에서 그는 클라크 회장과 마틴 글렌 대표이사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잇달았다.

▶오후 1시-FA, 앨러다이스 감독 경질 고려

오후 1시가 됐다. 이미 앨러다이스 감독과 FA 수뇌부는 만났다. 미팅은 오래 진행됐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질(sacking)이었다. FA가 앨러다이스 감독의 경질을 고려한다는 이야기가 솔솔 나왔다.

경질과 사임은 결이 달랐다. 경질은 대상자가 중대한 실책이나 위법을 했을 때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대상자는 배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앨러다이스 감독의 경우에 이 잣대를 들이대기가 쉽지 않았다. 앨러다이스 감독의 발언 자체가 '위법'으로 보기 힘들었다. 여기에 위장 잠입 취재에 당했다. 그리고 앨러다이스 감독 나름대로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했다. '친목 자리에서 웃자고 한 말'이었다.

사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상자'는 '당사자'로 바뀐다. 특정 처분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행동이다. 대상자는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이 맡고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바로 사임이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사임할 뜻이 없었다. 대표팀 감독을 맡은지 67일밖에 안됐다. 1경기를 끝냈을 뿐이었다. 아직 2018년 러시아월드컵까지 많은 경기가 남아있었다. 앨러다이스 감독과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온 카렌 브래디 웨스트햄 부회장은 "앨러다이스 감독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 평생 대표팀 감독을 원했다. 60이 넘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축구가 아닌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큰 망신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앨러다이스 감독과 FA수뇌부의 미팅이 끝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제 결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침묵으로 접어들었다. FA내에서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FA내부 소식통들은 "'FA는 앨러다이스 감독이 위장 취재에 당했다'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오후 5시 텔레그래프는 앨러다이스 감독 기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FA에 넘겼다. FA는 다시 한 번 고심에 들어갔다.

▶오후 7시 50분-FA, 앨러다이스 감독과 계약 해지 발표

결론이 나왔다. 오후 7시 50분. FA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FA는 '오늘 보도된 앨러다이스 감독의 행동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서 부적절한 것'이었다며 '앨러다이스 감독 역시 중대한 잘못을 했다고 시인했고 사과했다. 하지만 사항이 워낙 중대했기 때문에 FA와 앨러다이스 감독은 계약을 상호 해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FA의 선택은 '계약 상호 해지'였다. 경질을 하기에는 혐의가 부족했다. 사임을 선택하려니 앨러다이스 감독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결국 둘은 자연스럽게 '계약 상호 해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2분 뒤 앨러다이스 감독의 성명서도 나왔다. 그는 '최근의 일어난 사태들로 인해 FA와 계약 해지에 상호 합의했다'고 했다. '지난 7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 된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다'고 밝힌 그는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상당히 실망스럽다'고 후회했다.

앨러다이스 감독은 67일만에 대표팀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단 1경기만 지휘했다. 자신을 포함해 15명의 역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들(감독 대행 3명 제외) 중 최단기간 부임이었다. 웃픈(웃기지만 슬픈) 기록도 남겼다. 앨러다이스 감독의 공식 기록은 1전 1승, 승률 100%였다. 잉글랜드 대표팀 축구 역사상 최고 승률 감독으로 등극했다.

FA는 일단 앨러다이스 감독의 후임 인선에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FA는 '다음 감독이 선임될 때까지 열릴 4경기(몰타, 슬로베니아, 스코틀랜드, 스페인)에서는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21세 이하대표팀 감독이 지휘봉을 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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