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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honey] 구곡팔봉 두륜산에 안긴 호국 성전 대흥사

입력 2023-12-0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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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곡팔봉 두륜산에 안긴 호국 성전 대흥사
대흥사와 두륜산. 두륜산 바위 봉우리들이 누워 있는 부처 형상을 닮았다.[사진/백승렬 기자]


임진왜란 영웅 서산대사 법통을 계승한 명찰



(해남=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은 호국의 길을 되돌아보게 한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너이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대표적 인물인 서산대사(1520∼1604)가 묘향산에서 입적하기 직전 자신의 영정을 꺼내 들고, 그 뒷면에 쓴 시이다.
본마음은 80년 전이나 후에도 하나임을 표현한 글귀로 풀이된다. 한결같았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 마음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는 호국 정신이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 서산대사 의발을 간직한 대흥사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천여 명의 의승병을 이끌고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여 왜로부터 평양과 한양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며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해 전쟁터로 나가 나라를 구하게 하겠다며 서산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다.

그의 제자 사명당은 평양에서, 처영은 지리산에서 궐기해 권율 장군 휘하에서 싸웠다. 세계 불교사에서 승려가 전쟁에 참여한 사례는 드물다.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 부처의 뜻을 서산은 몸소 실천했다.

전쟁이 끝나자 서산은 선조가 내린 벼슬을 제자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에 들어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수도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의발, 즉 가사와 발우를 해남 대흥사에 보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흥사를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 만세불훼지지(萬世不毁之地,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라고 지칭하면서 말이다.
불교에서 승려의 의발은 스승이 제자에게 물려주는 교법, 즉 법통을 상징한다. 선조가 하사했던 금란 가사와 옥발우, 수저, 염주 등 서산의 유품이 대흥사로 옮겨지고, 제자 수백 명이 이주하면서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은 호국 사찰로 거듭났다. 서산의 의발은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굴욕을 씻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했던 정조는 서산의 충절을 널리 알리고 후대가 본받길 바랐다.
1798년 대흥사 경내에 서산을 추모하는 표충사(表忠祠)를 짓게 하고, 편액을 직접 써 하사했다. 서산, 사명, 처영 대사의 진영이 걸려 있는 표충사의 편액은 정조의 친필 휘호이다.
표충사에서는 서산대사를 기리는 유교식 제향이 매년 봄·가을 올려지고 있다.
2018년 유네스코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와 함께 대흥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서산대사 제향을 주목하고, 불교와 유교의 공존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서산은 왜 후계 사찰로 대흥사를 지목했을까. 각지를 주유하던 젊은 시절 두륜산과 대흥사를 방문했던 서산은 제자들에게 해남은 토양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해 살기 좋고, 한양에서 멀어 정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곳이라고 설명했다.
정여립의 난 때 무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서산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에서 불교가 정치 싸움과 권력의 횡포로부터 벗어나려면 중앙 정계와 거리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봤다. 서산의 법통을 이어받은 뒤 대흥사는 크게 번창했다.
조선 후기 대흥사에서는 대종사 13명, 대강사 13명이 배출됐다. 불보(佛寶, 부처), 법보(法寶, 불교 가르침), 승보(僧寶, 승려)를 간직한 사찰을 3보 사찰이라고 한다. 대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통도사, 대장경을 보관 중인 해인사, 고려시대 국사 16명을 배출한 송광사를 3보 사찰로 꼽는다.
송광사를 고려의 승보사찰, 조선 후기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한 대흥사를 조선의 승보사찰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서산의 유지를 잇기 위해 대흥사에는 호국 대성전이 건립되고 있다.
7년 여의 공사 끝에 건물 공사가 최근 끝났다. 내부 장엄은 앞으로 3년이 더 걸릴 전망이다.
목조 불교 건물로는 국내 최대가 될 호국 대성전에는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때 숨진 군인, 독립운동가, 열사를 비롯해 경찰, 소방관 등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을 기리는 제단이 마련될 계획이다.
일제 강점에 이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반복되면서 임진왜란의 기억은 쉼 없이 재소환되고 있다. 한반도 역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낸 한국전쟁의 비극과 완성되지 않은 종전은 호국의 소망을 간절하게 만든다. 그 소망을 담아낼 호국 성전의 완성을 기다린다.

◇ 고개를 들면 펼쳐지는 예술과 역사…대흥사의 현판들

한국에서 절은 특정 종교의 교당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 불교가 유교와 함께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양대 축을 형성하면서 사찰은 역사, 문화, 예술이 펼쳐지는 무대이자 요람이 됐다.

큰 절에는 불교 문화재, 역사 유적이 많은데 특히 문화, 예술 작품이 풍부한 대흥사에서는 웅혼한 예술적 기백과 역사의 소용돌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서예로 각자의 시대를 풍미했던 추사 김정희(1786년∼1856)와 원교 이광사(1705∼1777), 추사의 절친이었던 초의선사(1786∼1866) 사이에 얽힌 일화는 참으로 극적이어서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다.
왕족이자 양명학자였던 이광사는 동국진체, 즉 조선 고유의 서예체를 완성한 인물이다. 사견을 배제하고 사실을 중시한 역사서로 평가받는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의 아버지이다.
당파 싸움과 역모 사건에 연루돼 23년의 유배 끝에 완도 신지도에서 생을 마친 원교가 쓴 편액이 대흥사 곳곳에 걸려 있다. 대웅보전, 침계루, 해탈문, 천불전의 현판이 그것이다.

원교보다 80년쯤 뒤에 태어난 추사는 제주도 유배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가 원교가 조선의 서체를 망친 인물이라며 그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내리라고 초의에게 요구했다. 중국 정통 서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초의는 원교의 글씨를 내리고, 추사가 쓴 '무량수각' 편액을 대신 걸었다. 몇 년 뒤 추사는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올라갈 때 다시 초의를 만나 자기 생각이 짧았다며 원교가 쓴 편액을 다시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선방에 걸었던 '동국선원' 현판, 초의가 거처했던 일지암의 '일로향실' 현판이 추사가 대흥사에 남긴 휘호들이다.


천불전 출입문 위에 걸린 '가허루' 편액은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1770∼1847)이 썼다.
집안이 가난해 독학으로 서예를 배우고 칡뿌리로 만든 갈필을 사용했던 창암은 제주도 유배 길의 추사를 찾아가 자신의 글씨를 보여주고 평가를 부탁했다. 창암보다 16살 어렸던 추사는 시골에서 밥 굶지는 않을 만한 글씨라고 말하며 창암을 모욕했다고 한다.
기고만장하던 추사의 엘리트 의식을 보여준다. 유배가 풀린 뒤 추사는 창암을 찾아갔으나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추사는 창암 제자들에게 묘비 문을 써줬다.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이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공의 필법은 최고봉을 이루었고 입신의 경지에 들어 명성이 중국에까지 미쳤다"는 내용이다.

제13대 종사인 초의선사는 한국 최초의 다서인 '동다송'의 저자로, 한국의 다성으로 불린다. 시인, 화가, 서예가, 학자였던 그는 유학, 도교 등 제반 학문에 조예가 깊어 강진에 유배 와 있었던 다산 정약용 등 당대 학자들과 교류했다.
대흥사의 중흥을 이끈 초의는 말년에 두륜산 중턱에 일지(一枝)암을 짓고 은거했다. '일지'라는 당호는 '뱁새는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다'는 내용의 한시 구절에서 따왔다.
남종화가의 대가인 소치 허련은 초의의 제자였다. 초의는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했으며 허련은 초의와 추사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대흥사 성보 박물관에는 초의의 글씨와 그림, 소치가 그린 초의 초상화, 소치의 서화 등이 전시돼 있다.
정조가 쓴 '표충사' 편액은 매우 힘 있는 글씨로 통한다. 이 편액 옆에는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가 쓴 '어서각'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임금의 글씨가 있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임금의 휘호가 걸린 표충사는 유림의 괄시와 억압으로부터 대흥사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제주 유배 중인 추사의 방면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대광명전 편액도 신관호가 썼다.

현대의 서예가로는 강암 송성용, 여초 김응현, 운암 조용민 선생의 휘호가 연하문, 일지암, 일주문 등에 걸려 있다. 고개를 들자. 편액은 치열한 예술혼을 증언하고, 역사를 읽는 실마리가 된다.

◇ 한라산과 마주 보는 두륜산

대흥사 경내에 들어서면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 건 대흥사를 빙 둘러싼, 부드러운 두륜산 능선이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산이나 능선을 다른 곳에서 본 적 있을까 싶다.
구곡팔봉, 즉 아홉 계곡과 여덟 봉우리로 이루어진 두륜산이 만든 분지의 가운데 대흥사가 폭 안겨 있다. 공중에서 보면 여덟 봉우리는 물이 마른 백두산 천지의 축소판 같은 소천지를 만든다. 두륜산을 연꽃이라 치면 대흥사 자리는 꽃 수술에 해당한다.
두륜봉(630m), 가련봉(703m), 노승봉(685m), 고계봉(638m), 향로봉(469m), 혈망봉(379m), 연화봉(613m), 도솔봉(672)이 대흥사를 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노승봉에 올라섰을 때 멀리 남쪽에 구름 위로 솟은 한라산이 보였다. 길을 안내한 박충배 전 대흥사 성보박물관장은 10번 이상 두륜산에 올랐지만, 한라산 조망은 처음이라며 반가워했다.

북쪽으로 월출산, 동쪽으로 천관산 등 명산이 보이고 진도, 완도, 강진, 목포 앞 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펼쳐졌다.
대흥사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두륜봉, 가련봉, 노승봉은 누워 있는 부처의 형상을 띠고 있다.
두륜산은 보기에는 완만한 흙산이었지만 실제 올라 보니 암릉 구간이 북한산 의상능선이나 설악산 공룡능선 못지않게 오르기가 까다로웠다. 좁은 능선 길 좌우가 낭떠러지였기 때문이다.
나무 데크 계단이 설치돼 있어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발을 지지할 수 있는 쇠 발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쇠고랑이 바위 곳곳에 박혀 있었다. 평일인데도 산객이 꾸준히 이어졌다. 두륜산이 등산객의 사랑을 받는 산임을 알 수 있었다.


대흥사에서 처음 지어진 암자였던 만일암 터에는 고려 시대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이 엉거주춤하게 서서 보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령 1천200∼1천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천년수'라 불리는 이 나무는 좌우 균형이 잘 잡힌 수세가 일품이었다.
어떤 생명도 천 년 동안 흐트러지지 않는 균형을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천년을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년수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의 마애불상 설화와 관련 있다.
하늘에 살던 천동과 천녀는 계율을 어겨 쫓겨났다. 천상으로 돌아가려면 하루 안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해야 하기 때문에 끈으로 해를 이 나무에 매달고 조각을 시작했다. 천녀는 북미륵암에 좌상을, 천동은 남미륵암에 입상을 조각하기로 했다.
먼저 미륵불을 완성한 천녀는 천동을 기다리다 지쳐 해를 매달았던 끈을 잘라버리고 혼자 하늘로 올라갔다. 천동은 영원히 천상에 오르지 못하고 신선이 됐다는 전설이다.

북미륵암 마애불은 한국 불교 조각의 최전성기인 8세기 양식을 계승했으며, 국보로 지정돼 있다. 후덕하고 풍부한 표정에 생동감이 넘친다.

남미륵암 마애불은 미완성작이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의 큰 암벽에 새겨져 있다.
풍화로 마모돼 조각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외딴곳, 웅장한 바위에 보일 듯 말 듯 새겨져 있는 남미륵암 미륵불은 조용히 왔다가 말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생명을 대변하는 듯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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