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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창피해서 가→5·18 죄책감 有" 황석영, 韓 '포레스트 검프'의 소신 ('대화의 희열3')[SC리뷰]

이우주 기자

입력 2021-05-14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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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창피해서 가→5·18 죄책감 有" 황석영, 韓 '포레스트 검프'의…


[스포츠조선닷컴 이우주 기자]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고 불릴 정도로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 늘 있었던 황석영. 황석영이 작가가 된 이유도 근현대사 안에 있었다.



13일 방송된 KBS2 '대화의 희열3'에서는 황석영 작가가 첫 게스트로 출연했다.

역대 '대화의 희열' 게스트 중 가장 긴 이력을 가지고 있는 황석영 답게 출생지가 만주인 것부터 남달랐다. 황석영은 6·25전쟁부터 4·19혁명, 5·18 민주화 운동 등 격동의 현장을 몸소 겪은 산증인이다.

황석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4·19 혁명 현장 속에 있었다. 4·19 혁명은 황석영이 작가의 꿈을 처음 가지게 된 계기가 됐지만 황석영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고. 황석영은 "학교가 청와대 앞에 있었다. 4교시 쯤에 총소리가 들려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다 집에 보냈다. 하교하다 군중에 휩싸였다"며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더라. 뛰어가다 보니 친구가 쓰러졌다. 넘어진 줄 알고 일으켰는데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서 피가 쏟아지더라. 친구를 응급실 가는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는데 친구가 어디에도 없었다. 병원 뒷마당에 시신을 모아놓은 곳에 있었다"고 친구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이후 충격을 받은 후 황석영은 학교도 가지 않고 방황을 시작하며 결국 고3때 퇴학을 당했다. 이후 소설가의 꿈을 꾸며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황석영. 황석영의 어머니의 황석영에게 늘 책을 사주셨던 분이지만 소설가가 되는 것만큼은 크게 반대했다. 당시 작가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 황석영은 "어머니가 작가라는 건 제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거라더라"라며 당시 어머니가 반대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 황석영은 가출을 했고, 지방의 공사장을 떠돌다 우연히 절에 들어갔다. 절에 간 후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한 황석영은 8개월간 생활하다 어머니를 마주했다. "집에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황석영은 절 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26세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황석영은 적을 직접 맞닥뜨린 적은 없지만 적의 시신들은 많이 봤다고. 이는 황석영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황석영은 "날씨가 덥고 습하니까 시신이 부패한다. 거기에 도마뱀, 들쥐가 들끓는 걸 보면 귀신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데 집에 와서도 그 꿈을 꾼다. 그게 귀신이 된 거다. 역사적 사회적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돌아올 때 귀신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황석영은 "낮에 자고 있는데 동생이 내 팔을 밟았다. 나도 모르게 화병을 휘둘러 동생에게 내리쳤다. 어머님이 목사님을 불러서 안수기도까지 했다"고 전쟁 후유증을 고백했다.

황석영은 작품을 쓰기 위해 늘 그 배경에 가 취재를 하고 직접 생활까지 한다고. 농민 배경 책을 쓰기 위해 농민학교, 문화학교까지 운영했던 황석영은 1980년 5월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황석영은 5·18 민주화운동 현장엔 없었다고. 황석영은 "소극장을 만들기 위한 출판 계약금을 받으려 서울에 갔다. 5월 17일에 신촌 술집에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날 보더니 큰일 났다고 하더라. 계엄령이 내려지고 사망자까지 생겼다더라"라고 떠올렸다. 광주로 돌아갈까 했지만 이미 신분이 알려져있던 황석영이 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결국 황석영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며 서울에 남아 광주의 실상을 기록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일을 했다.

광주 시민들이 겪은 피해들이 상세하게 기록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는 5·18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최초로 알린 책이다. 당시 '장길산'으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황석영은 주변에서 '넘어넘어' 저자로 이름을 올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광주에선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끄러움이 있었다. 비겁하게 살았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난 서울에 있어서 그게 더 심했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저자로 이름을 올렸음을 밝혔다. 이후 황석영에겐 유언비어 유포죄가 적용됐지만 책의 파급효과는 매일 1000권씩 복사될 정도로 엄청 났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곡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자 역시 황석영이었다. 황석영은 곡을 제작한 이유에 대해 "유족들끼리 만나야 뭘 이야기하고 할텐데 유족들을 못 모이게 했다. 근데 경조사는 됐다"며 시민군의 대변인과 '들불야학' 창립자의 영혼결혼식을 시키며 유족들을 처음으로 모이게 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을 모이게 한 후 욕심이 생겼다며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제작하게 됐다.

황석영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는 끝이 없었다. 1989년엔 황석영의 방북 소식이 알려져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으로 황석영은 5년간 망명을 하고 5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황석영은 북한에 갔던 이유에 대해 "일본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짓궂게 북한에 대해 물어봤다. 한 번도 안 가봐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더니 분단의 운명을 체념하면 조국의 통일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냐고 하더라"라며 "당시에 너무 창피해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작가로서 창피했다"는 이유로 사회의 금기를 파격적으로 깬 황석영. 황석영은 "방북으로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뭐가 있냐"는 질문에 "방북으로 잃은 건 별로 없다. 시간이 지체돼서 이 나이까지 글 쓰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뉴욕, 베를린에서의 망명 기간 동안 얻은 것도 있었다며 "서방 자본주의를 직접 겪은 것 아니냐. 학교 같았다. 한반도라는 좁은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밝혔다.

황석영은 "나는 작가다. 광대는 그걸로 사는 것"이라며 "사회적 터부나 억압을 산산히 부수고 일상화시켜야 하는 게 작가라고 생각한다"고 작가로서의 소신을 밝혔다.

wjle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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