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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고서정의 승무원 칼럼] '서퍼스 파라다이스' 추억

2009-11-18 16:33

 제법 쌀쌀해진 초겨울 바람이 옷깃 사이로 파고든다. 몇 십 분 째 발을 동동거려도 기다리는 버스는 올 생각을 않고,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피곤한 하루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아, 그냥 이대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파도소리나 들으며 푹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출근길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꿈꿔보는 이런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기에 가장 어울릴만한 곳으로 나는 호주의 골드코스트를 추천하고 싶다. 호주의 남동부에 위치한 골드코스트는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황금해변이 약 40km에 걸쳐 펼쳐진 호주 최대의 해변 휴양지이다. 브리즈번 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 달려 골드 코스트에 도착하면 장시간 비행의 피곤함도 잊고 바닷바람에 홀린 듯 짐도 푸는 둥 마는 둥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이날도 역시나 오랜만에 찾은 아름다운 황금해변에 마음이 설레어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함께 바닷가 산책을 했다.

 골드코스트는 얼핏 하와이와 비슷하지만 하와이보다는 훨씬 젊고 캐주얼한 분위기이다. '서퍼스 파라다이스'해변을 중심으로 서핑, 요트, 다이빙 등을 즐기는, 보기 좋게 그을린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로 일년 내내 북적인다. 거리를 오가는 남녀 대부분이 상하의 모두 아슬아슬하게 차려 입은 로 라이즈(low-rise) 패션을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밀가루처럼 하얗고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솔솔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바닷가에서 서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조심스레 한 마디 한다.

 "이 근방 10km 내에서 우리가 제일 옷 많이 껴입은 것 같지않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나름 우리도 최대한 가벼운 옷차림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수영복에 그저 수건 한 장 깔고 드러누워 책을 읽거나 선탠을 즐기고 그 흔한 파라솔 대여나 아이스크림 스탠드조차 없는, 진정한 '자연 그대로의' 해변풍경이다. 그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 반한 나는 기꺼이 그 분위기에 동참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책 한 권, 비치 타월 한 장을 들고 해변가로 나갔다. 남들은 온몸으로 최대한 햇볕을 흠뻑 쪼이며 드러누워있건만 나는 애써 야자수 짙은 그늘을 찾아 얌전히 자리를 깔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페이지나 읽었을까?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나보다. 비몽사몽간에 어쩐지 얼굴이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어 눈을 슬쩍 떠봤더니… 아뿔싸! 해가 중천을 지나 야자수 그늘은 이미 한참 저 쪽으로 이동한 상태. 무방비상태의 맨 얼굴은 그렇게 남반구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웰 던(well-done)으로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럴 땐 우리나라 아줌마들의 필수품인 용접 마스크처럼 생긴 선캡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후로도 얼마동안 내 얼굴에는 안경원숭이 마냥 선글라스 자국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뜨거운 한낮을 보내고 해가 질 무렵, 아름다운 이곳에서의 시간이 아쉬워 우리는 해변 근처 노천 카페에 모여 앉았다. 서퍼들은 하나 둘 빠져나가고 검푸른 바다와 흰 파도만이 오가는 한적한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의 따뜻한 밤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골드코스트에서의 밤이 무척 그립다.

 다음 달에는 브리즈번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까? 새삼 제일 큰 선글라스를 꺼내 닦아보며 기대를 걸어본다.

 < 대한항공 객실 승무본부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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