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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영혼은 살아있다] 영혼 모범생

2004-03-18 13:54

고아 출신 50대여성 '백지 초혼' 부탁에 감탄
 구명시식도 나라별로 달라 뉴저지 법당 구명시식은 상당히 어수선한 편이다. 좌식 생활에 익숙한 탓에 장시간 양반다리를 한 채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한국식 구명시식은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왼쪽, 오른쪽 자세를 바꾸다 보니 의식이 분산돼 집중도가 떨어진다.
 반면 한국의 구명시식은 온돌방 문화에 익숙하다보니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것은 쉽다. 대신 손이 무척 분주하다. 특히 가방과 손수건을 만지거나 영단에 낼 동전 봉투를 이리 저리 옮기는데 짤랑대는 소리가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다. 또 귓속말이지만 이런 저런 말을 하며 눈빛 교환에 바쁘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오래 한 미국인과 교포들은 진득한 한국식 구명시식을 괴로워하고, 생각 많고 마음이 불안한 한국인들은 앉아 있기는 수월하나 손동작과 입이 가만있질 못한다. 양쪽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이 없다는 점. 하긴 마음이 편하면 굳이 구명시식을 청할까도 싶지만, 영혼 공부를 좀 하고 온다면 이런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영혼 공부의 1단계는 '영혼이란 과연 무엇인가'다. 흔히 영혼(靈魂)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영은 무엇이고 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귀신은 또 무엇인가.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영혼(靈魂)의 혼(魂)은 '육체가 없는 자아'를, 영(靈)은 '정신과 영혼을 다 지배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또 귀신(鬼神)은 '의식 세계는 가지고 있지만 육체를 가지지 못한 실존체'다. 모두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제각기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우리가 영(靈)이라 말하지 않고 영혼(靈魂)이라고 하는 까닭은 영(靈)이라 할 땐 죽은 사람 뿐 아니라 산 사람도 영의 범주에 들어가 생령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명시식은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하는, 귀신과 혼이 혼합하는 자리인 셈.
 구명시식에서 유난히 부산한 사람은 생활 습관 탓으로 돌리지만 사실은 영이 안정되지 못해서다. 본인이 안정되지 못하면 조상까지 흔들리는데 이런 상황에선 내가 아무리 구명시식을 열심히 해도 모든 것이 공염불이 되고 만다. 얼마나 괴로우면 기도비만 낼테니 알아서 해달라며 꽁무니 빼는 사람까지 있다. 부득이한 경우(몸이 매우 아프거나 외국에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함께 하느니만 하겠는가.
 간혹 가다 L씨처럼 따로 영혼 공부가 필요 없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녀는 50대 여성으로 고아원에서 힘들게 자랐지만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자식까지 잘 둔 정말 복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영가 초혼 명단은 백지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녀는 "법사님 힘드시겠지만 지금까지 천도되지 못한 수 많은 영가님들을 천도해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는 "그것은 지장보살님의 서원입니다"라고 만류하자 펄쩍 뛰며 "저는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제 뜻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L씨는 자신은 부모를 모르고 살았고 별로 그리워한 적도 없어 부모 영가는 초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한평생 지겹게 고생만 하다 죽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보니 항상 누군가 자신을 축복해 주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
 오래 전부터 간절히 구명시식을 올리고 싶었지만 조상도 부모도 몰라 망설이다가 이 기회에 천도되지 못한 영가들을 위하고 싶었다며 내게 미안해했다. 어떻게 영혼 공부도 따로 하지 않고 살아온 중년 여성이 영혼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이렇게 고울 수 있을까. L씨를 보며 영혼 공부를 이론적으로 하기보단 타고난 '필링'으로 영혼을 위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혼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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