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칼럼의 제목이 '디지털 36.5°C'이다. 사람 체온이 흐르는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정한 것인데, '제목만 그럴싸하게 붙여놓고 네가 뭐 디지털을 알아?'하는 분이 있을까봐 오늘은 디지털에 관한 이야기를 살짝 해볼까 한다.
게임 캐스터를 하면서 젊은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데, 참 많은 것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요즘 신세대들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하다. 언론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들은 '디지털 세대'다. 왜? 그저 컴퓨터를 기성세대보다 잘 다루어서? 필자는 그들의 모습에서 보다 깊숙한 디지털의 이데올로기를 읽는다. 디지털은 근본적으로 좋음과 싫음의 무한대 적용이다. 좋음(善)과 싫음(惡)을 각각 1과 0으로 치환해 놓고 1과 0의 조합으로 세상을 읽는다. 이를테면 공부란 무지(0)무지(0) 싫지만(0) 열심히(1) 한다면(1) 나를 행복하게(1) 만드는 필요한(1) 일이다. 공부를 디지털적으로 풀면 '0001111' 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어떤 순서로 섞여 있느냐로 현상을 읽는 것이다.
디지털의 1과 0은 십진법에서의 단순한 1과 0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표현해도 된다. 흑과 백, 빛과 어둠, 선과 악, 존재와 부재….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을 디지털로 읽자면 무지무지 커다란 연습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문장하나를 1과 0으로 표현해 내려면 엄청나게 많은 1과 0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두꺼운 연습장에 시 한편을 1과 0으로 표현해서 디지털로 번역을 해 적었다고 치자. 그것을 다시 시로 만들려면 그것을 해석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바로 그런 단순 노동을 인간의 몇만배쯤 빨리 처리하는 기계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계산기, 즉 컴퓨터다. 그리고 지금까지 컴퓨터는 '얼마나 빨리?'와 '얼마나 많이?'라는 두가지 주제로 발전돼 왔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속도와 용량의 문제였다. 그 속도와 용량이 충분치에 가까워지면서 이제 디지털은 그 능력을 다른 데 적용하는 주제로 고민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예컨대 1과 0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원이다. 용량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1과 0의 배치 순서만 남에게 전해준다면 시, 공간을 뛰어넘어서 남도 내가 가진 정보를 실시간에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네트워킹이다. 혹은 기록 문화를 대체하기도 한다. 기존에 빛과 공기, 온도와 습도 등 오묘한 자연 환경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질감과 형상을 기록하는 매체가 사진이나 영상 등이었다면, 이제 디지털 코드로 그것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영화나 디지털 카메라가 그 예다. 예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예전엔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만 기록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0과 1의 조합을 인위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상상속의 형상을 그린 후에 실존하는 것을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이다.
디지털은 언어이고, 관습이고, 철학이며 이데올로기이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종교가 그랬듯이 이제 곧 디지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할 것이다. 디지털로 대화하는 법을 모르거나 디지털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 살아가기 고달파질지도 모른다. 디지털에 반하는 것에 대해 종교 재판을 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는 하루 아침에 오지 않을 것이며 점진적이어서 누구도 변화가 급격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니까.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있다. 언어와 관습과 철학이 새롭게 재편되는 첫페이지에, 그 토대 위에 장성할 문화의 씨앗은 지금 뿌려야 하니까. 그 엄청난 능력과 발전 속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은 이제 막 걸음마를 연습하고 있다. 그 어설픈 행보에 기대야 하는 우리는 피곤하다. 그러나 바로 그 디지털 문화의 첫단추를 지금, 우리가 끼워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 게임 캐스터, ㈜조이챌 대표이사(nouncer@gamax.co.kr)>
게임 캐스터를 하면서 젊은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데, 참 많은 것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요즘 신세대들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하다. 언론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들은 '디지털 세대'다. 왜? 그저 컴퓨터를 기성세대보다 잘 다루어서? 필자는 그들의 모습에서 보다 깊숙한 디지털의 이데올로기를 읽는다. 디지털은 근본적으로 좋음과 싫음의 무한대 적용이다. 좋음(善)과 싫음(惡)을 각각 1과 0으로 치환해 놓고 1과 0의 조합으로 세상을 읽는다. 이를테면 공부란 무지(0)무지(0) 싫지만(0) 열심히(1) 한다면(1) 나를 행복하게(1) 만드는 필요한(1) 일이다. 공부를 디지털적으로 풀면 '0001111' 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어떤 순서로 섞여 있느냐로 현상을 읽는 것이다.
디지털의 1과 0은 십진법에서의 단순한 1과 0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표현해도 된다. 흑과 백, 빛과 어둠, 선과 악, 존재와 부재….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을 디지털로 읽자면 무지무지 커다란 연습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문장하나를 1과 0으로 표현해 내려면 엄청나게 많은 1과 0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두꺼운 연습장에 시 한편을 1과 0으로 표현해서 디지털로 번역을 해 적었다고 치자. 그것을 다시 시로 만들려면 그것을 해석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바로 그런 단순 노동을 인간의 몇만배쯤 빨리 처리하는 기계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계산기, 즉 컴퓨터다. 그리고 지금까지 컴퓨터는 '얼마나 빨리?'와 '얼마나 많이?'라는 두가지 주제로 발전돼 왔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속도와 용량의 문제였다. 그 속도와 용량이 충분치에 가까워지면서 이제 디지털은 그 능력을 다른 데 적용하는 주제로 고민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예컨대 1과 0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원이다. 용량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1과 0의 배치 순서만 남에게 전해준다면 시, 공간을 뛰어넘어서 남도 내가 가진 정보를 실시간에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네트워킹이다. 혹은 기록 문화를 대체하기도 한다. 기존에 빛과 공기, 온도와 습도 등 오묘한 자연 환경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질감과 형상을 기록하는 매체가 사진이나 영상 등이었다면, 이제 디지털 코드로 그것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영화나 디지털 카메라가 그 예다. 예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예전엔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만 기록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0과 1의 조합을 인위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상상속의 형상을 그린 후에 실존하는 것을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이다.
디지털은 언어이고, 관습이고, 철학이며 이데올로기이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종교가 그랬듯이 이제 곧 디지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할 것이다. 디지털로 대화하는 법을 모르거나 디지털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 살아가기 고달파질지도 모른다. 디지털에 반하는 것에 대해 종교 재판을 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는 하루 아침에 오지 않을 것이며 점진적이어서 누구도 변화가 급격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니까.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있다. 언어와 관습과 철학이 새롭게 재편되는 첫페이지에, 그 토대 위에 장성할 문화의 씨앗은 지금 뿌려야 하니까. 그 엄청난 능력과 발전 속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은 이제 막 걸음마를 연습하고 있다. 그 어설픈 행보에 기대야 하는 우리는 피곤하다. 그러나 바로 그 디지털 문화의 첫단추를 지금, 우리가 끼워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 게임 캐스터, ㈜조이챌 대표이사(nouncer@gamax.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