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1985년 내가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연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바쁘게 공연준비를 다그치고 있는데 우리 분장실에 후배 하나가 들어와 객석에 일본의 아주 유명한 연출가가 와 있다고 흥분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이다. 무슨 일로 왔을까? 내 방에 있던 다른 배우들도 다 같이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무슨 일. 공연을 보러 온 거지. 그렇지 않아도 그때 '아가씨와 건달들'은 한국연극계에 뮤지컬의 포문을 열어놓았다는 평판으로 연일 객석이 만원 사례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얘기에는 추호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그날도 무대 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며칠 뒤 시네텔이란 제작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가봤더니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바로 우리 공연을 보러 온 츠카코우헤이(한국명: 김봉웅)라는 연출가였던 것이다.
그는 재일 교포로서 '아타미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에서 아주 권위있는 기시다 희곡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그의 등장 자체가 일본연극계의 사건이라 불렸으며 일본 연극사가 그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일본연극을 뿌리째 바꾸어놓은 연출가였다. 그는 1980년에 '가마다행진곡'이란 작품으로 일본영화의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 뒤 돌연 연극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의 어머니가 한국에 영주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한국에서 작품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한국에서 제일 멋진 남자배우 3명과 여배우 1명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남자배우로는 전무송, 최주봉, 강태기 선배가 추천됐다. 당시 나로서는 감히 말도 못 붙이는 한국연극계의 최고배우들이었다. 여배우로는 그냥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내가 뽑혀서 내 공연을 보러 와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만들려고 한 작품은 '동경에서 온 형사'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한 재일교포 형사(강태기 분)가 서울시경에 배속되어 이복형인 부장 형사(전무송 분) 밑에서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인천바닷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최주봉 분)을 수사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역을 맡은 여자 형사와 사랑을 하게 된다는 내용.
그런데 그의 연습방법은 너무도 독특하고 파격적이어서 우리는 처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연극작업에 들어갈 때 먼저 대본을 앞에 놓고 분석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동경에서 온 형사'에는 아예 대본이 없었다. 연습첫날부터 그는 배우들을 세워놓고는 장면설명도 상황설명도 없이 대사를 주고 움직임을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줄거리과 배우들의 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대사를 만들어나간다. 그래서 대사는 연일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나의 눈빛, 작은 몸짓 하나하나 소홀히 보아 넘기지 않고 관찰해 나만의 독특한 에너지와 잠재되어 있는 내면의 다양성을 모두 끌어내 주었다. 이것은 단지 나만에 한한 것이 아니다. 배우들은 모두 연출가의 마력에 이끌려 마치 연극초년생처럼 연습에 푹 빠졌다. 연습시간 4시간 전에 모든 배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연습실로 달려오곤 했으니까.
이렇게 작품이 완성되어나가는데 공연을 20여일 눈앞에 두고 당국에서 공연불가 판정이 났다. 그때 우리는 당국의 처사에 분개하며 어떻게든 싸워서 공연을 올리자고 했는데 그는 "난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연극을 하러왔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틀 후 연습 실에 나타난 그는 전혀 새로운 '뜨거운 바다'라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80년대 한국연극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뜨거운 바다'라는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단 15일 만에 한 재일 교포 연출가와 네 배우가 만들어낸 사랑의 결정판이었다. 그의 개성 넘치는 작업 이야기는 계속 된다.
어느 날 바쁘게 공연준비를 다그치고 있는데 우리 분장실에 후배 하나가 들어와 객석에 일본의 아주 유명한 연출가가 와 있다고 흥분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이다. 무슨 일로 왔을까? 내 방에 있던 다른 배우들도 다 같이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무슨 일. 공연을 보러 온 거지. 그렇지 않아도 그때 '아가씨와 건달들'은 한국연극계에 뮤지컬의 포문을 열어놓았다는 평판으로 연일 객석이 만원 사례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얘기에는 추호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그날도 무대 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며칠 뒤 시네텔이란 제작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가봤더니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바로 우리 공연을 보러 온 츠카코우헤이(한국명: 김봉웅)라는 연출가였던 것이다.
그는 재일 교포로서 '아타미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에서 아주 권위있는 기시다 희곡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그의 등장 자체가 일본연극계의 사건이라 불렸으며 일본 연극사가 그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일본연극을 뿌리째 바꾸어놓은 연출가였다. 그는 1980년에 '가마다행진곡'이란 작품으로 일본영화의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 뒤 돌연 연극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의 어머니가 한국에 영주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한국에서 작품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한국에서 제일 멋진 남자배우 3명과 여배우 1명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남자배우로는 전무송, 최주봉, 강태기 선배가 추천됐다. 당시 나로서는 감히 말도 못 붙이는 한국연극계의 최고배우들이었다. 여배우로는 그냥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내가 뽑혀서 내 공연을 보러 와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만들려고 한 작품은 '동경에서 온 형사'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한 재일교포 형사(강태기 분)가 서울시경에 배속되어 이복형인 부장 형사(전무송 분) 밑에서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인천바닷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최주봉 분)을 수사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역을 맡은 여자 형사와 사랑을 하게 된다는 내용.
그런데 그의 연습방법은 너무도 독특하고 파격적이어서 우리는 처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연극작업에 들어갈 때 먼저 대본을 앞에 놓고 분석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동경에서 온 형사'에는 아예 대본이 없었다. 연습첫날부터 그는 배우들을 세워놓고는 장면설명도 상황설명도 없이 대사를 주고 움직임을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줄거리과 배우들의 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대사를 만들어나간다. 그래서 대사는 연일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나의 눈빛, 작은 몸짓 하나하나 소홀히 보아 넘기지 않고 관찰해 나만의 독특한 에너지와 잠재되어 있는 내면의 다양성을 모두 끌어내 주었다. 이것은 단지 나만에 한한 것이 아니다. 배우들은 모두 연출가의 마력에 이끌려 마치 연극초년생처럼 연습에 푹 빠졌다. 연습시간 4시간 전에 모든 배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연습실로 달려오곤 했으니까.
이렇게 작품이 완성되어나가는데 공연을 20여일 눈앞에 두고 당국에서 공연불가 판정이 났다. 그때 우리는 당국의 처사에 분개하며 어떻게든 싸워서 공연을 올리자고 했는데 그는 "난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연극을 하러왔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틀 후 연습 실에 나타난 그는 전혀 새로운 '뜨거운 바다'라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80년대 한국연극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뜨거운 바다'라는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단 15일 만에 한 재일 교포 연출가와 네 배우가 만들어낸 사랑의 결정판이었다. 그의 개성 넘치는 작업 이야기는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