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생전 벼슬이름에 집착 '실망감' |
사람은 고유명사와 명사로 살다간다. 고유명사라 함은 '김 아무개'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며, 명사는 그 뒤에 붙는 온갖 직함인 '선생, 사장, 회장, 부장'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고유명사에는 별 신경을 안 쓰는 반면, 이 명사에 유난히 집착해, 약간의 실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살아 생전에는 명함 뒤에 붙는 명사에 연연하고, 죽어서는 묘비명에 붙는 명사에 연연하는 우리네 세상사. 살아서는 어떤 화려한 직책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어서 묘비명에 붙는 명사만큼은 누구나 '소학생(小學生)'이어야 하지 않을까.
퇴계 선생, 율곡 선생, 송시열 선생 등,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몇몇 선각자분들만 '선생(先生)'이라는 명사를 쓸 자격이 될 뿐,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는 범부들은 죽을 때까지 배우며, 배우기 위해 태어난다 하여, 소학생(小學生)인 것이다. 그러니, 위패에서도 '학생부군신위'라 쓰는 것.
허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묘비명에까지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점점 소학생(小學生)이라는 묘비명이 사라지고, 작은 벼슬이라도 했다치면 벼슬 이름 붙이기에 연연하여, 아무개 판서, 아무개 도승지, 최근들어 아무개 장관, 아무개 국회의원 등 사뭇 의심스러운 명사들까지 묘비명으로 등장, 살아 생전 자신의 명사만큼 지은 업을 죽어서까지 훈장처럼 달고들 계신다.
따지자면, 적어도 정2품 이상의 벼슬만 묘비명에 관직명을 쓸 수 있었고,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는 죽은 후에 시호를 주어 사자(死者)를 높이는 것을 예로 삼았다. 그러니, 사실상 묘비명에 자신의 생전 직함을 나타내는 것은 '겸손'을 우선시 했던 우리의 선비정신과는 맞지 않는 일. 아무리 큰스님이라도 "소승(小僧), 문안드립니다"라고 하지, "노승(老僧), 문안드리오"라고 하지 않듯, 명사에 연연하는 묘비명 경향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얼마전 올린 구명시식에도 뜻하지 않게 묘비명이 문제가 되었다. 대대로 고위급 벼슬을 지냈다는 조선시대 명문가 집안의 구명시식이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영가들이 줄줄이 가마를 타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한 두분도 아니고, 영가들마다 가마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니 다른 영가들 보기에도 민망할 수 밖에.
그 뿐 아니었다. 내가 "아무개 영가시여!"라고 영가를 부르자, 어디선가 "아무개 좌찬성 대감입니다!"라며 직함을 부르지 않는다고 나타나길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습니다. 그러니, 벼슬이름을 불러주시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죽어서까지 살아 생전 벼슬에 집착하다니. 아무리 명문가라 할지라도, 벼슬 이름 안부른다고 안나타나려 하다니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물론, 이보다 더 심한 예는 많다. 한 예로는 단기간 장관을 역임하신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 영가분 역시 단기간이라할지라도 장관이라 불러달라며 한사코 '아무개 장관 영가'를 고집하셨다.
이는 갑오경장
때까지만해도 조선 땅에 성씨가 없는 사람들이 40% 이상이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이렇게까지 가문과 명사에 집착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 '줄행랑'이라는 말도 그 당시에 탄생했는데, 이는 노비들이 행랑채에서 줄지어 도망치는 장면을 보고하는 말이었다고. 그러니, 죄송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가문과 직함의 전통은 국민 대다수가 기껏해야 3대까지가 최고 오래된 전통이 아닐까 싶다.
몇주 전, 가을산의 단풍을 즐기다 우연히 한 묘소 앞에 발길이 멈췄다. 다 쓰러져가는 묘비에는 '아무개 소학생'이라고 소박하게 암각되어 있었기에, 묘의 주인이 궁금하였던지라, 조용히 영가를 청해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조선시대 명문가의 높은 벼슬까지 지낸 사대부 가문의 자손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는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환생하여 '소학생'으로 살고 있을 묘비의 주인공 영가. 그의 소박하고 정직한 삶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워야할 자세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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