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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우리나라에도 '빈곤 포르노' 가이드라인이 있다?


국내 140개 NGO 연합체, 2014년 '아동보호 미디어 가이드라인' 만들어
"아동 위험에 빠뜨리는 연출이나 작위적 설정, 지역·인종적 편견 조장 피해야"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때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프놈펜의 심장질환 소년 집을 방문해 촬영한 사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실은 22일 김 여사가 심장병 소년을 안고서 찍은 사진을 '빈곤 포르노'라고 비판하며 촬영 당시 조명까지 사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더불어민주당 장경태 최고의원을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런 가운데 장 의원은 같은 날 M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2014년에 우리 대한민국도 여러 국제기구나 NGO(비정부기구) 활동가들에 의해서 이런(빈곤 포르노에 해당하는) 사진들은 금기시해야 한다고 가이드라인을 이미 작성한 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빈곤 포르노'에 해당하는 사진·동영상 촬영이나 보도를 판단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있을까?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1981년 덴마크 인권운동가 요르겐 리스너가 굶주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기금 모금 운동에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에 공감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
국립국어원의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는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묘사한 소설,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또는 그것으로 동정심을 일으켜 모금을 유도하는 일'로 나와 있다.
국내외 언론 보도와 학술 논문, 관련 단체들의 발간자료 등을 종합해 보면 '빈곤 포르노'는 설령 도움을 주려는 선한 의도라 해도 빈곤이나 기아·질병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하는 데 그쳐 빈곤의 구조적 원인은 일깨우지 못하는 기존 구호 활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빈곤국 아이들을 '피동적이고 무기력한 지원 대상'으로 묘사해 지역적, 인종적 편견을 조장하고 고착화해선 안 된다는 각성을 담고 있다.
국제 구호개발과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하는 140여개 국내 NGO 단체들의 연합체인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는 2014년 세이브더칠드런, 월드비전, 유니세프 등 구호단체들과 공동으로 이 같은 반성을 반영한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016년에는 개정판, 2020년엔 영문본까지 나온 이 지침엔 인도적 구호·지원 활동 과정에서 아동이 등장하는 사진·영상물을 제작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이 담겼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유엔 세계인권선언, 유엔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등을 바탕으로 만든 이 가이드라인에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요 내용을 보면 유수의 구호단체들이 해온 모금 광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빈곤 포르노' 비판의 핵심 취지와 일맥상통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은 처음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 '빈곤 포르노'의 문제점을 다룬 많은 국내 언론 보도와 논의 과정에서 '빈곤 포르노'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하나의 준거로 여겨져 온 것으로 보인다.
이민영 고려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에서 "모금 활동은 이제 펀드레이징(fund-raising·기금 모금)이 아니라 이슈레이징(issue-raising·문제 제기)이 되어야 한다. 모금 활동이 돈을 모금하는 것에 목적을 두면 빈곤 포르노의 덫에 빠지기 쉽다"며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통해 후원 광고의 세부적 원칙을 마련했다고 언급했다.
이에 비춰보면 우리나라에도 '빈곤 포르노'로 비판받을 수 있는 부적절한 모금 활동을 막고 바람직한 구호 활동을 유도하기 위한, 관련 단체들이 인정하는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아동 구호활동 관련 사진·영상 촬영 시 '부적절한 사례'와 '바람직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어떤 사진과 영상물이 '빈곤 포르노'에 해당하는지를 가늠해볼 수도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무엇보다 미디어 활동 과정에서 아동과 보호자, 지역 주민의 존엄성과 권리, 의사를 존중하고 사생활을 보호하며 사후 피해를 예방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면서 베트남 아동들의 노동 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아동들이 반복해서 수심이 깊은 강에 들어가게 하거나, 에티오피아의 식수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 아동에게 연못 물을 마시는 장면을 재연시킨 사례, 예쁜 옷으로 차려입은 필리핀 아동에게 덜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도록 한 사례 등을 부적절한 사례로 들었다.
다만 콘셉트에 맞춘 사진 촬영이나 사실에 기반한 최소한의 연출은 허용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반드시 아동과 보호자의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하고 일상생활을 재연하는 정도로 제한했다.
또한 아동이나 보호자의 인권 침해를 막는 데서 나아가 지역적, 인종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 표현이나 보도를 막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등 빈곤·기아·질병의 구조적 원인을 조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이드라인은 또 아동과 보호자를 무기력한 수혜자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능동적 주체로 묘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한 NGO의 모금 방송에서 백인 남성에게 안겨있는 흑인 아이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을 대표적인 부적절 사례로 꼽았다. 아동을 불쌍한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함으로써 특정 인종은 의존적이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반대로 바람직한 사례로는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잠비아 시골 소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신 가난 속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그린 사례를 소개했다.
또 인도 채석장에서 일하는 아동들의 노동 현실을 그들이 가진 꿈·희망과 함께 보도한 사례와 아동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정면 대신 뒷모습을 촬영한 사례,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리아 내전 상황 대신 영국 가정의 행복한 일상이 전쟁으로 파괴되는 장면을 모금 광고로 사용한 사례 등도 바람직한 사례로 제시했다.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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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