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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은행·술집·놀이터' 역할 도맡은 구멍가게가 사라진다

"뭐든지 소식 정보를 들으려면 여기를 와. 한 일주일간 빼먹잖아? 그러면 마을에서 초상나도 몰라. 오늘 뭐 결혼식 있어도 모르고. 여기서 정보가 흘러가고 정보가 나오고. 며칠 안 온 사람은 뭔 일 있었냐고 묻고."
문화산업과 설화, 민속 등을 연구하는 박혜진·심우장이 쓴 '구멍가게 이야기'(책과함께)는 전남 담양의 구멍가게 '영천리 구판장'을 운영하는 주인의 말을 전하며 구멍가게의 역할을 되짚는다.
시골에서는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한 주민들은 서로 거의 매일 마주한다. 구멍가게에서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쏟아내는 이야기는 마을 소식이 되고, 주민들은 구멍가게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
책은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다"라며 "우체국·택배업체와 마을을 잇는 운송대행사, 외상은 물론 돈을 빌려주는 은행, 안주가 무상·무한 리필되는 술집,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놀이판"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이처럼 구멍가게가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일상의 역할을 해내는 멀티플렉스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기능한다고 소개한다. 또 스스럼없이 들르는 곳이다 보니 서로의 소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나아가 마을의 규칙과 가치를 유지하고 전승하는 장이 된다고 강조한다.
구멍가게가 마을공동체 및 외부 세계와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감정과 이성을 적절히 통제하며 중간자 역할을 잘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덧붙인다. 저자들은 "가게 주인은 마을공동체의 일원에 속하면서도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주변인이어야 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구멍가게가 구시대의 추억거리에 불과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답사 프로젝트를 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2011년 11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전남 22개 시·군 구멍가게 100여 곳을 방문했고, 최종적으로 58곳에서 주인과 단골손님을 대상으로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책 곳곳에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고단함도 묻어난다. 농촌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한다는 건 농사지을 땅이 없어 자식들을 돌보며 벌어먹어야 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마지막 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에는 농촌 인구의 감소로 구멍가게를 찾는 손님이 줄고 읍내에 들어선 대형마트 때문에 구멍가게 운영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상황도 전한다.
전남 구례의 '죽마리 구판장' 주인아주머니는 다시 태어나도 구멍가게를 하겠냐는 저자들의 질문에 손사래를 친다. 이 아주머니는 "다시 태어나믄 절대로 안 하지. 인연인데 나는 진짜로 이런 인연 같으믄 진짜로 안 해"라고 답한다.
손님들의 술버릇을 군말 없이 받아내야 하고 싸움이 난 경우 말리려다가 원망을 들은 일도 털어놓으면서 "이런 가게에서 술 팔아서 돈 버는 거는 진짜 귀신도 맘대로 못 쓸 거예요"라고 말한다.
전남 여수의 '풍류주막' 주인아주머니도 "참 나도 가이내(계집아이의 방언) 때는 웃는 게 인사였어. 이른 장사를 하니 그리됩디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지고 그러드라고. 욕도 잘해"라며 매일같이 별의별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달라졌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 약 10년 만에 구멍가게를 다시 찾았더니 답사한 58곳 가운데 24곳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많은 곳이 텅 비어 있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등 변한 모습에 아쉬워하지만, 저자들은 현재가 어떠하든 그 또한 그분들의 최선이 담긴 삶의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488쪽. 2만8천원.

raphael@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