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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프로 커리어' 마침표 이동국의 눈물 '(사커대디)아빠도 함께 은퇴한다고 했다'

[스포츠조선 노주환 기자]"아버지도 나와 함께 은퇴하신다고 했다."

프로 선수 23년을 마감하기로 한 K리그 레전드 이동국(41·전북 현대)은 아버지 이길남씨 얘기를 꺼내면서 꾹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부친 이씨는 '사커 대디'로 평생을 살았다. 이동국의 운동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육상에 이어 축구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30년 넘게 뒷바라지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출전한 거의 모든 경기를 지켜봤다. 아들의 몸에 좋다는 걸 구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아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뒤에도 아버지는 포항에서 전주로 차를 몰았다. 아들이 선수 은퇴를 결정하고서야 아버지도 함께 뒷바라지 은퇴를 선언했다. 이씨는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30년 넘게 아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이제 끝났는데 좀 시원섭섭하다"고 했다.

이동국은 28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선수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전날 전주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동국은 "30년 넘게 축구선수 이동국과 함께 하신 아버지도 은퇴하신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가슴이 찡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또 그는 "부모님께 고생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오늘 안 울려고 했는데 망했다"고 말했다.

1998년 고향팀 포항 스틸러스에서 데뷔, 23년을 달려온 그는 최근 긴 고민 끝에 선수 은퇴 결심을 했다. 지난 7월 무릎을 다친 이동국은 긴 재활 끝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빨리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장기 부상으로 하루 하루 조급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좋은 몸 상태가 아닌데도 욕심내서 (경기에)들어가려고 했고, 사소한 것들에도 서운해했다. 몸이 아픈 것은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이 나약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북 구단은 이동국에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은퇴를 종용한 적이 없다. 나이 40세 전후로 매년 1년 단위로 계약을 했다. 이동국은 2009년 전북 유니폼을 입은 이후 정규리그 7번, 아시아챔피언스리그 1번, 총 8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구단은 팀을 K리그 최고 명문 반열에 올려놓은 그에게 레전드 대우를 해줬다. 이동국은 그동안 최고의 예우를 해준 구단을 찾아가 은퇴 결심을 밝혔다.

그는 축구 선수로서 환갑에 해당하는 만 40세를 넘기고도 후배들과 똑같이 경쟁했다. 골박스 안에선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여름, 부상 이후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만둘 때가 됐다고 본 것이다.

이동국은 "프로 선수라는 직업은 선후배를 떠나 경쟁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프로에서 오래 갈 수 있는 비결이다. 단점을 보완하기 보다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장점을 만들면 프로에서 롱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골잡이로 역사에 남게 된다. 대한축구협회가 최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동국이 프로 데뷔 이후 각급 대표팀과 프로팀에서 뛴 공식 경기는 총 844경기다. 축구협회 집계, 한국 선수 역대 최다 경기 출전이다. 공식 경기 통산 344골도 기록했다. 이동국은 국가대표로 아시아축구연맹과 국제축구연맹이 주관한 모든 메이저대회에 출전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A매치 105경기에 출전해 33골을 넣었다. '발리 장인'답게 발리슛으로 넣은 골이 6골이나 된다. 그중 이동국은 2004년 12월 독일과의 친선경기 때 터트린 발리골을 가장 기억에 남는 득점으로 꼽았다. 그의 기록에서 유일한 아쉬움은 월드컵 본선 골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뛴 공식 경기가 800경기가 넘는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알게 됐다, 1~2년 잘 해서는 만들 수 없는 기록이다. 10년, 20년 꾸준히 잘했기에 가능한 기록이다. 좋은 경기력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 기록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면서 "아시아리그에서 스트라이커로 살아남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모든 팀이 외국인 공격수를 선호한다. 좋은 스트라이커를 키우려면 출전시간을 보장해주면서 구단이 계획을 세워야 한다. 최근 21세 이하 선수 의무 출전 규정이 잘 자리 잡아서 5~10년 안에는 대형 스트라이커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이동국의 지난 23년을 돌아보면 희비가 엇갈린 순간이 제법 있다. 그는 K리그에선 포항, 광주(상무), 성남 그리고 전북에서 뛰었다. 외국에 진출해선 브레멘(독일)과 미들즈브러(잉글랜드) 유니폼도 입었다. 그는 "포항에서 처음 프로 유니폼 받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2009년 전북에 입단해 첫 우승컵을 들었을 때가 최고의 순간이었다.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간이 아닐까. 반대로 2002년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는 고통스러웠다. 그때의 기억이 오래 운동을 할 수 있게 한 보약이 된 것 같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두 달 전 부상으로 놓쳤을 때도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좌절할 때마다 나 보다 더 크게 좌절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보다는 내가 행복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자신을 전북으로 이끌어준 최강희 감독(상하이 선화)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최 감독은 2018시즌을 끝으로 전북을 떠나 중국 슈퍼리그로 무대를 옮겼다. 이동국은 "최 감독님에게 평생 감사드리며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고의 파트너로 김상식 코치(전북)와 2009년 우승 주역 브라질 출신 에닝요 루이스 등을 꼽았다. 이동국은 11월 1일 대구FC와 '전주성'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출전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