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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휴먼스토리]롤러코스터 인생·'맏형' 리더십, 곽윤기 男쇼트트랙 부활 'key'였다

유년시절 구기종목에선 운동 소질을 찾기 힘들었다. 축구공을 차면 소위 '개발'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예외인 종목이 있었다. '스케이트'였다. 곧잘 얼음을 지쳤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곽윤기(29·고양시청)는 선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중학생이 돼서야 제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한 단계를 올라서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라이벌 덕분이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국내 지상파 방송사 해설위원이 된 이정수다. 선의의 경쟁에 둘은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그 때를 곽윤기는 이렇게 돌아본다. "10번 대결하면 정수한테 7번을 졌다."

곽윤기의 첫 올림픽은 2010년이었다. 무대는 밴쿠버였다. 5000m 계주 은메달에 공을 세웠다.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극적인 역전을 연출해냈다. '흥부자' 곽윤기는 메달 수여식 때 익살스러운 '시건방춤' 세리머니로 '깝윤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고 활발하다. 먼저 다가가 친분을 쌓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쇼트트랙계에서 마당발로 통한다.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 밴쿠버 대회가 끝나자마자 1000m 금메달리스트 이정수의 발목 부상으로 대신 출전하게 된 세계선수권대회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2010년 4월 불거진 '대표선발전 짬짜미 의혹'에 연루됐다. 쇼트트랙 대표팀 일부 코치와 선수가 국가대표에 선발될 수 있도록 대회에서 협조했다는 의혹이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대한체육회 등으로 구성된 공동조사위원회는 2009년 대표선발전 1000m 준결선에서 곽윤기와 이정수가 서로 도왔다고 판단, 최소 1년 이상의 자격정지를 권고했다. 곽윤기와 이정수 측은 바로 이의신청을 제출, 2010년 7월 대한체육회로부터 6개월의 완화 조치를 받았다. 대표선발전은 물거품이 됐고 세상은 그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2년 세계선수권 종합우승으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2년 뒤 소치올림픽 대표선발전을 앞두고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하고 말았다. "선수 생활 중 가장 큰 부상이었고,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곽윤기의 솔직한 고백이다. 곽윤기는 남자대표팀의 노메달 수모를 TV로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시 4년이 흘렀다.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가까스로 평창행 티켓을 따냈다. 그는 남자대표팀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올림픽 경험을 가진 선수가 곽윤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8년 전 '막내'가 이젠 '맏형'이 돼 있었다.

곽윤기는 막내일 때 톡톡 튀던 매력을 잠시 감췄다. 대신 진지함으로 '중무장'했다.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소치올림픽 때 노메달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맏형' 리더십은 강력했다. 항상 밝은 미소와 희생으로 후배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데 조력했다. 말 한 마디에도 동생들의 기를 살려주려고 노력했다. "우리 남자대표팀은 역대 최강의 팀이라 느끼고 있다."

그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22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벌어진 대회 5000m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은 날아갔다. 그러나 환하게 웃었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선수이고 싶다"는 곽윤기, 그의 '맏형' 리더십은 한국 남자 쇼트트랙 부활의 키다. 강릉=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