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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정신대 할머니의 한 맺힌 日 강제노역 법정 진술

"폭격 화상으로 평생 일도 못 하고 반소매도 못 입었어. 어휴, 내 신세 망친 일본놈들한테 보상을 받아도 시원찮아…."


25일 오후 광주지법 304호 법정에서 민사1단독 김현정 판사의 심리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3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세번째 변론기일이 열렸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다.
소송 원고인 김영옥(85) 할머니는 이날 법정에 나와 당시의 끔찍했던 고통을 직접 진술했다.
대대로 한약방을 했던 집안의 외동딸인 김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일본 오사카에 살다가 여수로 왔다.
그러나 한국말에 서툴러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1944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들로부터 "일본에 가면 하루 일하고 하루는 공부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 할머니의 조부는 전쟁이 한창이라며 반대했지만 김 할머니는 일본의 친구와 친척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가족들 몰래 일본행 배에 탔다.
일본 생활은 기대와 정반대였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도착한 뒤 공부는커녕 매일 쇠줄을 가지고 부품을 반질반질하게 갈고 닦는 작업을 해야 했다.
월급도 받지 못했고 매일 매일 공습의 두려움에 떨며 머리맡에 신발을 두고 잠을 청해야 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 폭격 피해로 팔과 가슴에 큰 화상을 입어 지금까지 반소매 옷을 못 입는다고 했다.
"폭탄이 떨어져 큰 드럼통이 펑 터졌는데 내 팔이랑 젖가슴이 절단되는 느낌이었다"며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또 "납이 몸 군데군데 박히고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하얀 연고만 발라줄 뿐 주사 한 번도 놔주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화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수십 년간 진물과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폭격으로 생긴 흉터 때문에 혼처를 구하지 못해 결혼도 늦어졌다.
아들을 낳아 생계를 유지할 때에도 맨손으로는 그릇을 제대로 씻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을 겪었다.
김 할머니는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 지진 때도 손을 심하게 다쳤고 고(故) 최정례(사망 당시 15세)씨는 당시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앞서 상속 지분을 근거로 360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했던 최 할머니의 유족 이경자(73·여) 할머니는 이날 재판에서 위자료를 3천만원으로 상향 청구했다.
김 할머니와 숨진 피해자 최씨의 유족 이 할머니가 제기한 3차 소송은 지난해 11월 첫 공판이 열렸고 다음달 30일 오후 다음 변론이 열릴 예정이다.
areum@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