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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서 부활한 일제 군국주의의 망령

하얀색 바탕에 붉게 물든 태양, 태양의 빛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다. 관중석 곳곳에서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섬뜩하게 펄럭였다.

일제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 났다. 30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간의 2012년 여자청소년월드컵(20세 이하) 8강전에서는 일제의 잔재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거리낌 없이 등장했다. 본부석 왼쪽편에 자리를 잡은 일본 팬들 사이에 욱일승천기가 등장했다. 선수 입장시 올라간 대형 일장기 밑에 작지만 분명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곧 자취를 감추는 듯 했던 욱일승천기는 전반 8분 시바타 하나에(20·우라와 레즈)의 선제골이 터지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한-일전은 축구가 아닌 '전쟁'이었다.

경기장 바깥의 분위기도 사나웠다. 일본 팬들이 본격적으로 몰린 경기시작 1시간 전부터 일장기와 일본 왕가를 상징하는 국화 문양, 자극적인 문구로 요란하게 치장한 검은색 밴이 도로를 질주했다. 지붕 위에 달린 대형 확성기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 때 일본군이 틀었던 군가가 자랑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소 자국민들에게도 외면 당했던 극우단체들도 이날만큼은 신바람을 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한-일전을 앞두고 노심초사했다. 평소에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 양국이 제3국이 아닌 장소에서 만났다. 독도와 일왕 사죄 발언 등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도 확인했다. 일본축구협회(JFA)가 정치적 이유를 들어 욱일승천기 반입을 금지했다가 뭇매를 맞고 입장을 철회한 사건도 FIFA 관계자들의 우려를 살 만했다. 일본의 홈 구장, 그것도 일본 축구의 심장과 다름없는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펼쳐지는 한-일전은 부담이었다. 경기 하루 전 데보라 도우 FIFA 안전담당관은 양팀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양국의 민감한 상황과 관련해, 팬들이 정치적인 응원문구나 배너, 플래카드 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양국 선수들이 응원단을 자극할 수 있는 세리머니나 발언 등을 자제해주기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FIFA의 생리가 그대로 반영됐다. 하지만 일이 결국 터졌다. 독일 나치의 철십자 문양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욱일승천기는 자랑스럽게 도쿄의 하늘을 수놓았다. 일본 경찰과 대회 자원봉사자들이 입구부터 이중으로 관중들의 소지품 검사를 실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도쿄의 기적'을 바랐던 한국 선수들은 전반에만 세 골을 내주면서 무너졌다. 시바타에 선제골을 내준 지 7분 만인 전반 15분 전은하(19·강원도립대)가 동점골을 터뜨리면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전반 19분 시바타가 아크 정면에서 시도한 왼발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전반 37분에는 다나카 요코(19·고베 아이낙)가 문전 혼전 중 이어진 패스를 가볍게 오른발로 밀어 넣어 점수차가 벌어졌다. 한국은 후반전 반격에 나섰으나, 일본의 밀집수비에 해법을 찾지 못했다. 주포 여민지(19·울산과학대)가 왼발목 부상을 참으면서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했지만, 끝내 침묵했다. 일본의 뻔뻔한 작태에 일침을 가해주길 바라는 붉은악마의 외침이 들렸지만, 어린 선수들에게 지워진 부담감의 무게는 컸다. 득점이 터질 때마다 기립박수를 치는 일본 관중들 사이에 점점 더 작아졌다. 나오지 말았어야 할 뻔뻔한 작태는 도쿄의 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쿄=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