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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이정후의 길,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2001년 이치로[스조산책 MLB]

[스포츠조선 노재형 기자]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정후가 시범경기 초반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데뷔 시즌 활약을 예고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바람의 손자'가 진짜 바람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다.

이정후는 3일(이하 한국시각)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홈경기에 결장, 휴식을 취했다. 샌디에이고 김하성도 결장해 코리안 빅리거 맞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전날까지 이정후는 3게임에 출전해 타율 0.444(9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을 기록했다. 볼넷과 도루는 아직 없지만, 선구안과 베이스러닝도 평가가 긍정적이다.

밥 멜빈 감독은 지난달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데뷔전에서 1안타에 적극적인 베이스러닝을 보여준 이정후에 대해 "분명히 일정 수준의 스피드를 갖고 있다. 작년 발목 부상으로 조심스러워 했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 보니 발이 꽤 빠르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기대된다"고 했다.

지난 1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서 109.7마일 라인드라이브 홈런을 쳤을 때는 "출발이 좋다. 패스트볼, 브레이킹 볼 어떤 공이든 잘 맞힌다"고 말했다.

이정후를 향한 시선이 기대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ESPN은 지난 1일 '2024년 판타지 베이스볼 픽: MLB 루키 및 유망주 랭킹' 코너에서 이정후를 5위로 올려놓으며 이렇게 적었다.

'이정후는 뛰어난 컨택트 감각과 접근법 뿐만 아니라 스피드도 갖고 있다. 다만 순수 파워는 가벼운 편이다. 그의 파워를 최대치로 보면 에반 카터와 비슷하다. 그리고 (KBO에서)많은 도루를 하지는 않았고 아직 빅리그 투수들을 많이 상대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긍정적 전망은 카터급 정도다. 종합하면 이정후는 모든 것이 작동할 경우 두 자릿수 홈런과 도루에 3할 타율을 올릴 수 있다.'

카터는 텍사스 레인저스 중견수로 최고 유망주다. 지난해 데뷔해 23경기에서 타율 0.306(62타수 19안타), 5홈런, 12타점, 15득점, OPS 1.058을 마크했고, 마이너리그 108경기에서는 타율 0.288(420타수 121안타), 13홈런, 67타점, 79득점, 26도루, 81볼넷, 111삼진, OPS 0.863을 기록했다. 카터는 이 랭킹서 이정후보다 하나 위인 4위에 올랐다. ESPN 언급대로 이정후와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통계 전문 팬그래프스 예측 시스템 '스티머(Steamer)'는 이정후의 데뷔 시즌 성적을 134경기, 타율 0.291(558타수 162안타), 12홈런, 58타점, 84득점, 9도루, 출루율 0.354, 장타율 0.430, wRC+ 115, 볼넷 비율 8.2%, 삼진 비율 9.1%, WAR 3.4를 제시했다.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다퉈도 될 만한 수치들이다.

이정후의 성공을 확신한다는 내용이 그라운드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출신으로 성공한 투수는 수두룩해도 타자로 성공한 케이스는 많지 않다. 성공의 범주를 '올스타+통산 1000안타'로 한정하면 스즈키 이치로와 마쓰이 히데키 뿐이다. 여기에 실버슬러거와 골드글러브 수상 경력을 포함하면 김하성과 오타니 쇼헤이가 추가될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요시다 마사타카와 스즈키 세이야는 이제 1~2시즌을 치렀을 뿐이다.

이 가운데 '명예의 전당'급은 이치로 밖에 없다. 이정후를 '감히' 이치로에 연결하는 건 입단 당시 평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2019년 은퇴한 이치로는 내년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이 생긴다. 2019년 마리아노 리베라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득표율 100%, 만장일치 입성이 예상되고 있다.

그는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자마자 MVP와 신인왕을 석권했고, 2010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 골드글러브. 3할, 200안타를 이어갔다. 통산 3089안타로 이 부문 역대 25위에 올랐다. 117홈런, 509도루도 기록했다.

이치로가 또 위대한 건 메이저리그 19시즌 동안 부상자 명단에 딱 한 번밖에 안 올랐기 때문이다. 2009년 시범경기 막판 출혈성 궤양으로 IL에 오른 그는 개막 후 고작 8경기를 결장했다.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 처음 소개됐을 때를 보자.

이치로는 시애틀 입단 2년 전인 1999년 스프링트레이닝에 참가해 51번이 적힌 시애틀 유니폼을 입고 2경기를 뛰었다. 당시 척 암스트롱 시애틀 사장은 "일본의 켄 그리피 주니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이치로는 그에게 "그리피 주니어와 외야에서 같이 뛰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시애틀 투수 제이미 모이어는 그해 미일 올스타전에 참가한 뒤 "이치로는 매일 나에게 미국에서 뛸 수 있는지를 물어봤고, 매리너스에서 뛰고 싶다고 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시애틀 간판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그가 우리의 리드오프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게 이곳에 오도록 확신을 심어주고 싶다"고 했을 정도다.

당시 시애틀 스카우트 부사장으로 로드리게스 뿐만 아니라 훗날 추신수 스카우트도 주도했던 로저 존지워드는 "정확성, 어깨, 수비, 스피드가 플러스 수준이고 파워는 평균 미만"이라면서 "그는 리드오프 혹은 2번 타자가 될 수 있고, 200안타를 치고 도루도 일정 수준 할 수 있다. 우리 라인업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알렉스와 주니어 앞에서 스피드, 출루를 담당하길 바란다"고 했다.

칭찬과 희망 일색이었다. 파란 자이디 샌프란시스코 사장이 지난해 12월 16일 이정후 입단식에서 "공을 맞히는 능력, 빠른 발과 수비, 우리 팀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리드오프 중견수로 뛸 것"이라고 했던 것과 유사하다.

당시 이치로는 "난 오디션을 보러 온 게 아니다. 이곳에서 뛰는 내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내가 일본 출신 첫 빅리그 타자가 될 수 있는지에는 관심 없다. 최고의 야구와 상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 특유의 당돌함을 벌써 드러냈다.

결국 이치로는 2000년 12월 최초로 포스팅 절차를 밟고 3년 1400만달러의 조건으로 시애틀에 입단했다. 시애틀이 적어낸 입찰액은 1312만5000달러. 일본계 기업 '닌텐도 아메리카'가 시애틀 구단 대주주였기에 이치로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이치로의 좋은 것만 본 건 아니다.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가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시아에서 온 첫 야수였다.

이치로는 훗날 은퇴 후 NBC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일본에서 온 이후 모든 사람들이 날 의심했다. 하지만 한 계단씩 밟아가며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날 의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01년 2월 스프링트레이닝이 시작됐을 때 루 피넬라 감독은 이치로를 탐탁지 않게 바라봤다고 한다.

시애틀타임스는 2021년 7월 29일 '이치로가 이치로가 됐던 2001년 매리너스를 기억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피넬라 감독은 애리조나 캠프에 온 이치로가 치는 걸 보고 당황했다. 공을 반대 쪽으로 밀어치는 걸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피넬라 감독이 그에게 공을 잡아당겨 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감독을 보더니 가끔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가 끌어당겨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날렸다. 피넬라 감독은 걱정을 멈췄다'고 전했다.

이후 다혈질의 피넬라 감독은 이치로의 타격에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2001년의 이치로는 이치로 그 자체였다. 적응기도 없었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애틀은 2022년 와일드카드로 2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 이전 마지막으로 가을야구를 한 게 바로 이치로가 메이저리그를 정복한 2001년이다. 그해 116승의 전설이 이치로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간판 '빅3'가 차례로 시애틀을 떠난 직후의 성과였다.

시애틀은 1998년 여름 30대 중반을 넘어선 에이스 랜디 존슨을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했고, 2000년 1월에는 그리피 주니어를 신시내티 레즈로 보냈다. 그리고 그해 말 FA가 된 A로드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10년 2억5200만달러, 당시 북미 스포츠 최고액 계약을 맺고 시애틀과 작별했다. 그러나 시애틀 팬들의 좌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이정후는 샌프란시스코 스프링트레이닝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분위기가 2001년 봄 이치로와 비슷하다. 샌프란시스코는 2021~2023년에 걸쳐 포스터 포지, 케빈 가우스먼, 카를로스 로돈, 브랜든 벨트, 작 피더슨, 브랜든 크로포드 등 간판들이 대거 떠났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오프시즌 동안 이정후를 비롯해 3루수 맷 채프먼, 선발 조던 힉스, 지명타자 호르헤 솔레어 등 전력 보강이 꽤 쏠쏠했다. ESPN은 'FA 랭킹 톱20 중 채프먼, 힉스, 솔레어, 그리고 이정후 등 4명을 데려왔다. 지난 겨울 샌프란시스코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정후는 샌프란시스코의 부활을 이끌 선두주자로 꼽힌다. 2001년 캠프에서 의심을 지워나간 이치로처럼 말이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