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um App

Experience a richer experience on our mobile app!

[인터뷰]정재영, 불편한 영화를 보게 만드는 '배려'의 배우

보는 내내 불편하다.

어느 편에도 선뜻 설 수 없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동네 목욕탕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딸을 죽인 17세 고등학생들의 철 없고도 잔인한 행동을 응징하는 아버지 상현의 이야기다.

타이틀처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상황. 쉽게 동의하기 힘든 영화다. 상현에게 몰입하다가도 거리를 둬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고민에 빠뜨린다. 불편한 영화지만, 껍데기만 있는 영화와 달리 알맹이가 있는 영화다.

"영화를 선택할 때 일부러 불편한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은 없을거다. 그건 힘든 일이다. 가족들과 함께 보기도 그렇고. 하지만 영화라는 게 꼭 웃고 떠드는 감정만 주는 게 맞는건지는 모르겠다. 다양한 영화를 보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또한 영화다."(이하 '일문일답')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고민하게 만든다. 혹시 연기를 하면서 답을 찾았나?

▶답을 낸다면 편하겠지만, 영화가 이렇다고 내주진 않는 것 같다. 답을 낼 수도 없는 이야기고 말이다. 그래도 굳이 답을 찾지 않아도 생각만 해본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지 않나. 보통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사건이 생겼다면 잠깐 이야기하고 잊어버리는데, 이번 기회에 생각해본다는 자체가 생각을 쌓이게 만들지 않나.

-불편한 주제를 자극적이지 않게 끌고가려는 구성은 좋더라.

▶ 나도 그렇지만 감독도 말초적이기만 한 자극적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더 큰 주제가 담겨 있지 않은가.

-딸을 잃고 분노하는 아버지 역할에 몰입했다. 감정을 계속 지키는 게 쉽지 않았겠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 역할이 주는 본능적인 요소가 있다. 자식을 가지고 있는 부모라는 심정에서 오는 본능, 감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 촬영 기간 내내 계속 유지하고 있고, 밝은 촬영보다 우울한 날이 훨씬 많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무겁고 우울한 것을 안 좋아한다.

-원래 분위기 메이커란 소문이 자자하다.

▶연기할 때 진지하지만 농담을 좋아한다. 농담이 80%, 그 속에 진담이 20% 정도다 보니 그런 소리를 듣나보다.

-본인도 그렇지만 가족들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해 하지 않던가.

▶ 아내는 봤다. 아이들은 당연히 보지 못했다. 아내가 '마음은 아프지만,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 물론 가족의 입장으로 봤기때문에 일반 관객처럼 생각할 지 모르겠다. 사실 시나리오 볼 때만 해도 아내는 반대를 했었다. 엄마 입장에서 내용 자체가 너무 세서 말이다. 아이들 키우는 입장에서 굳이 이런 영화에 출연해야겠느냐고 물었었다.

-사실 시나리오에 비해 많이 순화됐다는 평도 있다.

▶ 아내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훨씬 더 불편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있고, 그런 영화라면 질색팔색하는 관객도 있을 수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게 순화된 측면이 있다.

-불편한 영화를 편하게 보려면 방법이 있을까.

▶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횟수가 아닐까. 1년에 책을 300권 읽는 사람과 10권 읽는 사람의 선택은 다르지 않나. 그런 면에서 파워블로거들을 보면 놀랍다. 전문가 수준으로 보는 것 같다.

-요즘 인터뷰를 자주 한다.

▶ 늦게 개봉하고, 빨리 개봉하는 영화들이 겹쳤다. 투자사도 다르고, 제작사도 다르다보니까 본의아니게. 원래 1년에 한 번 인터뷰 했는데, 요즘 3주에 한 번 하니까 인터뷰가 일상이 된 느낌.

-인터뷰가 일상이라면 배우 생활하면서 별별 일이 있다면?

▶배우가 아니었으면 겪지 못할 상황과 직업들을 가져보는 게 별별 일 아닐까. 깡패도 하고, 누군가를 죽여보기도 하고, 5층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그런 것을 어디서 해보겠냐. (예쁜 여자 배우들과 로맨스도 해보지 않나) 그렇다. 내가 어디서 이나영, 한지민과 뽀뽀도 해보겠나. 대놓고 착하고, 순진한 이미지도 가져보고 말이다. 영화 찍다보면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장소도 간다.

-'방황하는 칼날'에서도 추위에 딸의 복수를 위해 눈을 밟더라.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 아버지가 딸의 복수를 위해 괌에 간다? 수영복 입고 해변가에 찾아다닌다면 납득이 될까. 그만큼 역경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한 설정일 뿐이다.

-연기도 일상으로 느껴질 때가 있나.

▶내게 연기는 일상이자, 직업이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프로라고 해도 된다. 직업이란 뜻은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어느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고민도 해야하고, 그 고민이 없어질 때면 지겨워지고 재미도 사라지는 것이다.

-질리기 시작할 때 다시 '열정'을 찾는 방법이 있는가.

▶ 만약 한 가지 배역만 10년 념게 한다면 그럴수도. 하지만 새로운 배역에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 하는 한 그럴 일이 없다.

-그런 선택은 주연배우만 할 수 있는 특권 아닌가.

▶단역부터 조연, 두루 거쳤다. 배우는 선택을 받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안정된 것을 좋아하고, 모험을 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는 난 감사한 일이다. 나같은 경우 끈기가 별로 없다.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다. (결혼 생활은 계속 하지 않는가) 유일하게 싫증나지 않는 부분이 우리 아내와의 삶이다. 하하.

-이번 드라마에서 어린 배우들과 호흡을 많이 맞췄다. 특히 어린 배우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딸, 상현(정재영)에게 폭행을 당해 죽는 청소년 가해자, 마지막에 총을 겨누는 주범 조두식 등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됐는데.

▶ 최대한 편하게 해주려 했다. 그 친구들이 연기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아니다. 오디션을 보고 처음으로 영화를 시작한 경우도 있다.연기라는 게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건 단순히 연기력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배려를 받아 본 적이 있지 않나. 언제 누구였나.

▶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고작 단 2씬 나오는 영화였다. '박봉곤 가출 사건'이었다. 안성기 선배와 심혜진씨가 주연을 맡았다. 그때는 말도 안되게 열정만 가득할 때였는데, 스물여섯살짜리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그때 안성기 선배와 연기를 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을 내 마음대로 표현했다. 순간 감독마저 당황하는 찰라에 안성기 선배가 '어 이거 좋은데 계속 해봐'라며 편하게 받아주셨다. 그 순간이 지금까지 잊지 못할 값진 경험이 됐다.

-안성기씨가 기억을 할까.

▶ 영화 '실미도'를 함께 할 때 그 때 그 기억을 이야기 하시더라. 당시 나는 무척 괴짜로 보였다고 하시더라. 안 선배가 요즘 다른 후배들을 만났을 때 내 이야기를 하면서 '재영이도 예전에 너처럼 그랬다. 너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라고 말한다더라. 그 당시의 내 모습이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 자체가 경험 없는 후배 입장에서는 큰 축복이다.

-시간이 다 됐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 영화는 나날이 갈수록 흉악한 청소년 범죄를 다뤘다는 점에서 배우가 아닌 어른으로서 말하고 싶은 바가 있는가.

▶ 아이는 어른의 과거이고, 어른의 거울 아닌가. 애들만 욕할 필요가 없다. 먼저 어른이 변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아이들도 변하지 않겠는가.

김겨울기자 winter@sportschosun.com